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바스 Jun 01. 2021

이 주인공은 경험이 있어요?

녹음중 갑작스런 질문을 받았다.

보통 장편의 오디오 드라마 녹음 기간은 5~6개월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분량이 짧은 오디오 드라마일 경우에는 금방 녹음이 마무리되지만 보통 오디오 드라마로 제작되는 웹소설은 장기 연재로 진행되기에 분량이 많다. 최대한 웹소설 원작 독자들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웹소설의 중요 사건과 복선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도 방대한 분량의 웹소설 전부를 담아내는데 어려울 때가 많다.


웹소설의 주요 포인트가 되는 장면 중의 하나가 19금 장면이다. 주인공들의 사랑 관계를 증명하는 방법 중 가장 중요시되는 부분이다. 은유적으로 묘사되는 장면들도 많지만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장면도 많다.

내가 담당하던 작품의 대부분은 아침 새가 지저귀는 오전 시간에 녹음을 시작했다. 그렇기에 아침 녹음부터 19금 장면이 나올 때면 괜스레 헛기침을 하게 된다. 성우님들과의 소통도 이럴 때면 최소화되기도 한다.


다른 동료들에 비해 내가 담당하던 오디오 드라마 수위는 높지 않았다. 특히 이번에 제작하게 된 작품의 주인공들은 알콩 달콩 티키타카 하며 스킨십 진도도 조심스러웠다. 무엇보다 순결을 중요시 여기고 있었다. 후반부쯤 다다르자 가벼운 입맞춤만 하던 남주와 여주가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가벼운 입맞춤이 자주 반복되자 깊은 입맞춤이 되었다. 그러다 결국 첫날밤을 보내게 된 것이다. 첫날밤을 보내기 전 두 주인공이 키스를 하는 장면이 있었다. 거친 호흡과 뜨거운 입맞춤으로 두 주인공은 자신의 전부를 서로에게 걸겠다며 고백하는 중요한 장면이었다.


두 주인공의 뜨거운 첫날밤을 위해 녹음실에는 주연을 맡은 성우님 두 분만 남아 있었고, 다른 성우님들은 녹음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 주연의 성우님은 서서히 뜨거운 감정을 고백하며 연기를 시작했다. 호흡도 점점 거칠어져 가고 목소리는 가늘어졌다. 기나긴 사랑 고백이 끝난 뒤 드디어 키스를 시작했다. 점점 더 거칠어져 가는 호흡 가운데 갑자기 남주 성우님께서 연기를 멈추고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PD님, 근데 이 주인공은 경험이 있어요?

"네? 허헉, 잠시만요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이네요. 작품 좀 확인해 볼게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남자 주인공은 경험이 있는 것일까? 남주는 고귀한 신분의 세자였다. 여자에게 관심조차 없었지만 여주를 만나게 되면서 여자와 사랑을 알아 가는 캐릭터였다. 기억하는바 원작에서는 주인공에게 빈과 후궁은 없었다. 여태껏 솔로였다. 그렇다면 분명 모든 것이 첫 경험일 것이다. 그런데 경험이 있는것과 없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질문을 받은 뒤 3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처음이라면 호흡 소리가 다른가? 키스만 하는 건가? 여러 시덥잖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작품 흐름상 키스 후 첫날밤을 치르게 된다.


내가 생각하던 무대의 그림은 고결한 두 주인공이 아름답게 첫날밤을 경험하는 것이다. 행동 하나하나 조심스럽고 정결하며 순결한 느낌이 담기면 좋겠다 판단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두 주인공의 첫날밤이 묘사된 장면이기도 하니 더욱 특별했다. 아름답게 묘사된 첫날밤을 그려내야 한다. 원작에서도 구체적인 첫날밤의 묘사보다 은유적으로 표현되었기에 자극적으로 연출하기에는 더 조심스러웠다. 서둘러 피드백 마이크 버튼을 누르고 성우님께 이야기했다.


"성우님, 분명 처음으로 생각됩니다. 지금껏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은 부분으로 봐서 확실합니다. 오늘 두 분이 서로에게 순결을 바치는 장면이라 생각합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부탁드릴게요"


첫 키스와 첫 날밤. 진솔한 사랑고백을 끝으로 둘은 입을 맞추며 밤은 더 깊어져 갔다. 다행히 세세한 묘사로 그려진 장면이 아니기에 은유적으로 아름답게 연출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두 주인공의 호흡 연기가 가장 중요했다. 두 분의 연기 호흡은 길면 길수록 좋다. 잘 나오고 필요한 부분만 잘라서 사용이 가능하니 최대한 긴 호흡을 부탁드렸다. 그런데 연기 시간이 길어지자 점점 더 뜨거워졌다. '쪽, 쪽'소리도 나기 시작하고 호흡은 더 거칠어져 갔다. 아름다운 배경음악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에 최대한 깔끔하고 조심스러운 호흡이 필요했다. 결국 10분 이상 호흡만 반복 녹음하며 두 주인공의 첫날밤은 마무리가 됐다.


다행히 녹음은 잘 나왔고 첫날밤 장면도 아름답게 연출됐다. 이후로 나는 다른 장면을 몰라도 키스신, 첫날밤 장면이 나올 때면 성우님들께 미리 말씀드리고 있다.


"주인공은 경험이 없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