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자리
내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동네 사람들이 지어준 '술곤조통’이라는 별명 하나로 요약된다. 옛날 여느 아버지 들 못지않은 괴팍한 성격에, 지독히 가부장적이셨던 분. 우리 가족들에게 아버지는 항상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버지가 마흔여덟이 되던 해, 나는 늦둥이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큰누나하고는 무려 20살 차이. 보통 늦둥이라면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클 법도 한데, 자식들이 여섯이나 되어서였는지, 살림살이 퍽퍽한 탓에 나는 그저 '자식 중 한 명'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자랐다. 어머니는 자상하셨지만, 먹고사는 일에 치여 자녀 교육이나 세심한 보살핌을 주시기엔 여력이 부족하셨다.
집안 분위기는 늘 살얼음판 같았다. 누나들은 고등학교만 졸업하자마자 부리나케 서울로 취업해 떠나버렸다. 그러고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겨우 집에 왔다. 나보다 열세 살이나 많은 형은 나를 살뜰히 챙기기보다는 항상 짓궂게 괴롭히곤 했다그나마 내게 위안이 되었던 건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되던 해, 형이 일찍 결혼을 하고 조카가 태어났는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어머니가 손주를 키워주셨다. 늦둥이고 동생이 없던 나는 조카를 친동생 삼아 정을 붙였다. 삭막했던 집안 분위기 속에서도 조카와 함께한 시간만큼은 따뜻하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숨 막히는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건 아버지가 환갑이 되시던 해였다. 교회에 다니시기 시작하면서 술과 담배를 끊으셨고, 자연스레 술주정이나 실수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몸의 습관이 고쳐졌다고 해서 마음의 상처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술만 드시면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어머니와 누나, 형에게 손찌검하시던 그 기억들... 어린 시절의 그 트라우마는 내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아버지를 살갑게 대하지 못하게 만드는 두꺼운 벽이 되었다.
형제들이 하나둘 출가해 가정을 꾸린 뒤에도 우리 가족에게 '살가운 정'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 역시 결혼을 하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나 서먹함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내 첫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이후 때마다 찾아오는 기일에도 아버지가 그립거나 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어머니가 건강히 계셔서 그렇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내 삶에서 아버지의 빈자리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제사 대신 추도식이라는 기독교식 예배를 드린다. 그마저도 내가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된 후로는, 아버지 기일을 그저 마음으로만 기억하고 넘어가는 해가 많았다. 아버지 산소도 지척인 공원묘지에 있어 벌초 등 관리할 필요가 없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도 않았다.
내 나이 어느덧 50대 중반,
문득 이런 질문이 가슴을 쳤다.
'지금 내 나이쯤... 그때 아버지는 어떠셨을까? 그때 아버지는 무슨 고민을 하셨을까?'
시대는 다르지만, 그 나이에 하는 고민은 과거나 현재나 매한가지인 것 같다.
경제적 걱정과 다가오는 은퇴에 대한 불안, 커가는 자식들의 앞가림 걱정, 집안 대소사, 그리고 예전 같지 않은 몸... 지금 내가 짊어지고 있는 이 가장의 무게를, 30년 전 아버지도 똑같이 지고 계셨던 것이다.
그때는 그저 괴팍한 술주정으로만 보였던 아버지의 모습이, 이제 와서 보니 그 어려운 시절 감당하기 버거운 현실을 잊기 위한 50대 가장의 몸부림은 아니었을까. 남자는 다 그런가 보다. 평생 아버지를 투영하며 살아간다. 내가 딱 그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아버지도 참 힘드셨겠네..."라는 늦은 독백을 내뱉게 된다.
이번 주말, 어머니가 계신 동두천 누나네 집에서 형제들 모임이 있다. 어머니 생신 겸 이른 새해 인사로 모이는 자리다. 작년에 형님이 먼저 세상을 떠나 조금은 허전하고 쓸쓸한 자리가 되겠지만, 오랜만에 매형들과 누님들과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모이면 아버지 이야기는 잘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힘든 기억들도 먼 추억이 되었건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묘해서 흉터는 옅어져도 기억은 여전한가 보다.
지난 추석, 나는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벌초할 필요도 없는 공원묘지지만, 아들과 함께 절을 올리고 기도도 드렸다.
짧으면 20년 후, 나도 분명 저 자리에 누워 있을 것이다. 그때 내 아들들도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느낄까?
바라는 게 있다면 딱 하나다. 훗날 내 두 아들이 나를 떠올릴 때, 미움이나 원망보다는 그리움이 먼저였으면 좋겠다. 사무치게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런 아버지로 기억되고 싶다.
아버지의 자리는 아버지가 떠나고 나서가 아니라, 내가 그 자리에 앉아보고, 그 나이가 되어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인가 보다. 내년 아버지 기일에는 두 아들과 함께 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