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님, 이번 작품에 저희와 함께해 주시겠어요?
그날 올리브영에 갔다.
아침보다 밤의 기분이 어떨지 궁금한 날이다.
평소 시계로 사용하는 핸드폰에 자꾸 시선이 간다.
마치 N극과 S극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기류가 흐른다.
단 한 번의 벨소리에 온 몸의 감각이 깨어난다.
- 여보세요?
- 네 고객님 안녕하세요~이번 신용대출....
- 죄송합니다....
꼭 이럴 땐 누가 희망고문 실험이라도 하는 건지 스팸 문자와 전화가 잦다.
전화를 끊는데, 통화 중 매너콜 문자가 와있다.
오 마이갓
기다렸던 오디션 본 곳의 연락이다.
숨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바로 통화버튼을 누른다.
연결이 되는 동안, 긍정적인 계산을 해본다.
'탈락이라면, 문자를 줬겠지. 전화까지 주는 곳은 없었어. 합격일 거야.'
담당 PD가 전화를 받았다.
"네 배우님, 저희 측에서 회의한 결과 **역으로 함께하고 싶은데 어떠세요?"
반은 합격, 반은 불합격이었다.
'반'이라는 이유는 사실 내가 원했던 역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디션에 붙었다는 것이 기분은 좋았다.
뒤이어 2주 전쯤 보았던 오디션에서도 연락이 왔다.
마찬가지로, 원했던 역할은 아니었지만 합격이었다.
마지막, 같은 '반 합격'의 연락을 받아 그날 총 3곳의 합격소식을 들었다.
하하.
사실 기분이 좋으면서도 아쉬웠다.
'한 작품이라도 내가 원하는 배역이었다면..'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도 기쁜 순간을 만끽하며 누군가에게 자랑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
계약서를 쓰기 전까지, 카메라 앞에 서기 전까지, 통편집당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
가족들에게도 세세히 말하지 않는 편이다.
촬영이 취소됐을 때, 작품이 엎어졌을 때, 통편집당했을 때가 있었다.
나보다 실망하는 가족들의 반응이 더 속상했던 기억에 설레발치지 않기로 했다.
올리브영에 가본다.
평소 화장을 잘하지 않기에 대충 메이크업 코너를 지나
팩 코너에서 구경을 한다.
사실 팩은 냉장고에 쟁여놓고 쓴다.
슬그머니 맨즈 코너에 가본다.
그리곤 적당한 디자인에 적당한 가격의 상품을 골라 계산대에 올려놓는다.
선물포장까지 한다.
그다음 향한 곳은, 약 2년이란 시간 동안 죽는소리만 하러 갔던 정신과 병원이었다.
오늘은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사실 누군가에게 자랑을 하고 싶었다.
그다음 일까지는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오늘 일에 대해서만.
선생님은 내 기대에 부응해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이 웃어주셨고
많이 칭찬해주셨다.
내가 아쉬워하는 부분에 대한 조언까지 해주시면서.
덕분에 '반 합격'이라는 아쉬운 마음은 많이 사라지고 주어진 역할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집으로 돌아가 그제야 침대 위에서 웃음을 터뜨리며 온 몸을 흔들었다.
나 오디션 다 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