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를 먹지 않겠소
14.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은 짓
나는 바나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바나나 우유 먹고 오바이트를 한 이후로 신선한 생 바나나만 가끔 먹고 다른 혼종은 웬만하면 즐기지 않는다. 특히나 바나나 우유를 연상케 하는 거무튀튀한 익은 바나나는 유독 싫어한다. 이런 사소한 취향 하나로도 기억에 남을 불화가 싹틀 수 있다는 걸 누가 알았을까.
2011년 9월에 나는 엄마, 이모와 함께 스페인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무려 22박 23일간 스페인의 주요 도시 5곳을 돌고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가는 자유여행이었다. 내가 여행을 모두 기획해야 했고 현지인들과의 소통도 내 몫이었기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내가 갓 취직을 한 터라 많은 돈을 쓸 수 없었다. 현지 물가가 생각보다 비싸, 가끔 점심으로 과일과 빵을 사서 공원에서 먹곤 했다. 지중해성 기후 특유의 선선한 바람과 뜨거운 햇살이 '나 외국에 있소'를 실감 나게 했던 날씨였다. 돈이 없어서, 혹은 외국에 왔다는 핑계 덕분에 수많은 스페인 과일과 이름으론 확인이 되지 않는 치즈, 그리고 달콤한 빵을 원 없이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하루는 바나나를 샀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엄마는 나에게 확인차 "바나나 안 먹을 거야?"라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응, 안 먹을 거야. 그거 양 많아 보이는데 다 먹을 수 있어요?"라고 재차 확인했다. 다 드실 수 있다고 하셨기에 바나나를 샀다. 그런데 살 때부터 나는 느낌이 안 좋았다. 왠지 다 못 드실 것 같은 필이랄까. 역시 엄마는 그걸 다 드시지 못했다. 이모까지 거들며 너무 많이 익은 바나나를 먹었지만 결국 1~2개가 남았다. "바나나 너무 많이 익어서 오늘 다 먹어야 하는데 버리기 아깝잖아. 이거 먹어."라는 엄마의 제안. 나는 조용히 거절했다. 왜냐, 나는 바나나, 특히나 많이 익은 바나나는 정말 싫어하니까. 이건 호불호를 넘어서 나의 몸이 반응하는 문제였기에 나는 싫은 걸 굳이 해야 하나 생각했다. 그리고 애초에 나는 먹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았던가.
결국 우린 그렇게 대판 싸웠다. 엄마는 내가 정도 눈물도 없다느니, 이렇게 부탁하는데 안 들어준다느니, 바나나가 아깝지 않냐느니, 쏟아내다가 직접 드셨다. 나에게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 생각했고, 정말 너무너무 싫어하는 익은 바나나를 내가 왜 먹어야 하나 싶었다.
아직도 가끔 그때 이야기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나를 매정한 딸로 보곤 한다.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지 않았냐며. 8년이 지난 지금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나는 조금 다른 협상을 해볼 테다. 내가 정말로 엄청나게 바나나를 싫어하지만 엄마를 위해서 이걸 먹겠노라, 이건 순수하게 엄마만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억지로 먹었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겠지만 우리의 관계는 부드러워졌을 테고 지친 여행의 한 조각도 훈훈해졌을 테다. 어차피 여행의 목적은 이거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