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효의 순간

#24. 죄송합니다

by 수현

누구나 '불효'의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평소에 험한 말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더욱 크게 다가온다. 나의 그 순간도 여전히 생생하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은 나에게 무척이나 힘든 시기였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상황도 싫었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하는 내 모습이 더 싫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고 몸은 몸대로 힘들어서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상황이었다. 하루는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었던 것 같다. 햇빛이 쨍하던 날이었다. 엄마는 나에게 부산에 있는 대학을 가라고 제안하셨다. 순간 나는 폭발해서 처음으로 엄마에게 화를 냈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방황을 많이 했었다. 중학교 때 학교에서는 모범생이었지만 늘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의 꿈은 '자아실현'이었다. 나는 내가 왜 태어났는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고 싶었다. 당시 다큐멘터리로 '간디학교'를 방영해 준 적이 있다. 나는 고등학교 대신 저기를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당연히 강하게 반발하셨다. 웬만한 건 다 허용이 되는 분위기였는데 그건 안된단다. 나도 집안의 반대를 꺾을 만큼의 의지는 없었나 보다. 대신 엄마는 나에게 특목고를 가라고 말씀하셨다. 특목고를 가면 훨씬 공부가 수월하다고 했던가? 별로 관심을 두지 않다가 설명회에서 남녀공학에 합반이란 이야기에 나는 특목고를 가게 되었다.


엄마가 특목고에 가라고 했을 때는 그만큼의 이상을 심어준 것과 다름없었다. 그곳엔 부산의 각지에서 온 날고 기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무엇을 꿈꾸는지와는 별개로 분위기에 휩쓸려 더 열심히 공부했고 더 넓은 세상을 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나는 그렇게 치열하게 경쟁하는 내 모습이 싫었다. 나는 나자신을 탐구하고 있지도 않았고 오로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공부하고 있었다. 싫은데 해야 하는 그 모든 상황을 엄마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면 어디까지 가는지는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암울한 집안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꼭 서울로 갈 거라고 말씀드렸다. 그 말이 입밖에 나온 순간부터 나는 후회했다. 엄마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려고 이렇게 화를 낸 건 아니었는데.


그 이후로 한 번도 이 일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없다. 엄마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엄마가 아니라 내가 했어야 했다고 꼭 한번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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