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인간형 이족보행 로봇 '아틀라스'를 보며 든 소회
SF 소설가 DJUNA의 「첼로」는 로봇과 사랑에 빠진 중년 여성의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이라기보다는 짝사랑에 가깝다. 주인공은 폐기 직전의 인간형 안드로이드를 맡아 돌보게 되고, 그 과정에서 로봇에게 연애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그 감정은 일방적이다. 로봇은 주인공을 특별히 사랑하지 않는다.
어느 날 그 로봇은 자신과 같은 기종의 다른 로봇을 만나고, 그 로봇을 자신과 주인공이 사는 집으로 초대한다. 중년 여성과 두 로봇, 세 존재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균열이 생긴다. 인간 주인공은 대학교수로, 평균 이상의 지적 교양을 갖춘 인물이지만 두 로봇의 사고 속도와 추론 능력은 인간의 언어적 반응을 훌쩍 넘어선다.
지적 열세 위에 또 하나의 균열이 겹친다. 두 로봇은 인간이 상상해온 ‘이상적인 외형’을 그대로 구현한 존재다. 매끈하고, 대칭적이며, 불필요한 흔적이 없다. 주인공은 그들과 마주 앉아 자신이 가진 신체의 불완전함, 노화, 우연성 같은 것들을 의식하게 된다. 그녀의 열등감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로 확장된다.
‘저 완벽한 로봇에 비하면 인간은 얼마나 더럽고 우스꽝스러운 존재인가?’이 질문은 소설 속에서 끝나지 않는다.
2021년 현대가 소프트뱅크로부터 보스턴 다이내믹스를 인수했을 때, 이 회사는 묘한 위치에 있었다. 로봇이 미래라면, 왜 이 기업은 구글에서 소프트뱅크로, 다시 현대라는 손을 거치며 거래의 대상이 되었을까. 기술이 부족해서였는지, 상용화가 어려워서였는지, 혹은 인간 사회가 아직 이 로봇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명확한 답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최근 CES에서 공개된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이족보행 로봇 ‘아틀라스’를 보며 그 질문은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h1ZfLjF3RI
아틀라스는 인간을 닮지 않으려는 로봇처럼 보였다. 관절은 자유롭고, 앞뒤의 개념이 흐릿하며, 몸통과 머리는 360도 회전한다. 손은 손바닥과 손등의 구분 없이 접힌다. 인간의 신체가 수백만 년의 진화 끝에 ‘적당히’ 효율적인 형태라면, 아틀라스의 움직임은 처음부터 효율을 목표로 설계된 결과처럼 느껴진다.
그 영상을 보고 난 뒤, 헬스장에서 거울에 비친 인간들의 몸이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비대칭, 과잉, 노화의 흔적. 인간의 신체는 더 이상 기준이 아니라 비교 대상이 된다. 효율적이고 유려하며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한 로봇의 움직임 앞에서, 인간은 설명 없이도 열등해진다.
아틀라스는 결국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또 다른 ‘아틀라스’, 즉 인간을 대체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노동의 대체가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지탱해온 이유, 인간이 인간이었던 근거가 사라지는 데 있다. 우리는 무엇을 더 떠받들 수 있을까. 그 과정은 진화라기보다는 자연 소멸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일론 머스크는 저출산을 이유로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대체할 AI와 로봇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만든다. 그 모순은 위선이라기보다는 정확한 현실 인식에 가깝다. 인간의 쓸모는 이미 계산되고 있고, 효율의 기준에서 밀려나고 있다.
「첼로」의 중년 여성처럼, 우리는 언젠가 더 똑똑하고 더 아름다운 존재들 곁에서 말없이 앉아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느끼게 될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라, 어쩌면 오래전부터 예고되어 있던 열등감일 것이다.
*아틀라스의 키를 190cm으로 정한 순간, 인간의 외형 서열은 끝났다. 정우성도, 원빈도, 차은우도, 그리고 나도 예외 없이 아틀라스보다 키가 작은 인간일 뿐이다. 남자의 키에 민감한 연애 시장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어차피 남자의 98%는 이미 아틀라스보다 작다. 그러니 우리모두 조금 더 너그러워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