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은 너무 열심히 살았다>

회사에선 허프로, 오늘부터는 왼손잡이<1>

by 허배우 actorheo

숨이 차올라 펜을 바꿔 쥐었습니다


​1초의 오차도 없던 인생이 멈췄을 때
​20년 넘게 대기업에서 일하며 내 몸은 '효율'이라는 엔진으로 돌아가는 기계와 같았다. 사람들은 나를 '허프로'라고 불렀고, 나는 그 이름에 걸맞게 1초의 오차도 없이, 누구보다 빠르게 오른손을 휘두르며 살았다.


​하지만 40대 중반, 사방에서 조여오는 책임감의 무게는 내 엔진을 과열시켰다. 연로하신 부모님의 병원 예약, 중고생 아이들의 진로 상담, 그리고 회사의 살벌한 성과 지표들... 어느 순간 나는 숨을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 절박한 순간, 나는 펜을 왼손으로 옮겨 쥐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찾던 '나만의 시간'은 물리적인 여유가 아니라, '느리게 가는 법'에 있었다는 것을.


왼손의 시계는 느리게 흐른다


​오른손으로 쓰면 10초면 충분할 문장을, 왼손으로 쓰려면 3분이 넘게 걸린다.
글씨는 비뚤어지고 손목은 뻐근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행위가 느려지자, 시간이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오른손이 미친 듯이 성과를 향해 달릴 때, 왼손은 한 획 한 획 '과정'을 온몸으로 감각하게 한다. 잉크가 종이에 스며드는 속도, 펜촉이 도트 위를 지나가는 질감... 그 비효율적인 느림이 내 마음속에 생각지도 못한 '여백'을 만들어주었다.


​그 여백 속에 비로소 '나'의 생각이 들어와 앉기 시작했다. 숨 가쁜 세상이 멈춘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안의 시계를 왼손으로 천천히 돌려 세운 것이다.
​아들의 상품권으로 산 '3분의 여백'


​준비물이 필요하던 찰나, 중학생 아들이 수학 시험 상으로 받아온 문화상품권 2만 원을 내밀었다. 현금으로 바꿔달라는 녀석에게 2만 원을 쥐여주고 남은 그 종이 조각은, 나에게 단순한 상품권이 아니었다.


​아들은 문제를 '빨리, 잘 풀어서' 받아온 상장이었지만, 엄마인 나는 인생의 문제를 '느리게, 천천히 풀기 위해' 그 종이를 들고 서점으로 향했다. 부족한 차액은 내 카드로 긁으며 생각했다.
​"그래, 내 인생의 잔금은 이제부터 내가 치르는 게 맞다."


​아마추어 허프로의 선언: 비뚤어져도 괜찮아


​왼손필사는 단순히 글씨를 연습하는 공간이 아니다. 성과주의의 최전선에서 깨진 한 직장인이, 왼손이라는 느린 도구를 통해 자기만의 '생각의 여백'을 확보해가는 생존의 기록이다.


​나는 앞으로 이곳에 <오른손은 너무 열심히 살았다>라는 제목으로 나의 치유 기록을 남기려 한다.


낮에는 1초의 오차도 없는 프로로 살겠지만, 밤에는 1분에 단 한 문장도 겨우 쓰는 서툰 왼손잡이가 되어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누릴 것이다.


​이 기록이 나와 같이 숨찬 하루를 보내는 모든 '샌드위치 세대'에게, 시간을 느리게 흐르게 하는 작은 마법이 되기를 바란다.

독자 여러분께
비뚤어진 글씨는 제 마음의 여백입니다. 조금 못나도, 조금 느려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마추어'니까요.

​- 회사에선 프로, 인생은 아마추어.


아마추어 허프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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