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히는 삶을 번역하다-옐레나와 아스뜨로프 (2)

의미를 잃은 욕망이 방향을 바꿀 때​

by 허배우 actorheo

​어느덧 사십 대 중반이다. 회사원으로 산 지 20년이 넘었다. 남들은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제 속은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얼마 전 받아 든, 납득하기 힘든 인사고과 성적표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건, 무기력함이었다.

​매일 거래처를 만나고, 현장을 돌고, 매출 숫자를 맞추는 일상. 누군가의 공간을 쾌적하게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정작 내 마음의 온도는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이 잿빛으로 보이던 어느 날,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를 다시 펼쳤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골 의사 '아스뜨로프'를 만났다.

​"숨이 막히는군(Душно)."

​그의 첫마디가 마치 내 입에서 나온 말 같았다. 19세기 러시아의 시골 의사가 느꼈던 권태와 21세기 한국의 직장인이 느끼는 질식감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회사생활의 숨구멍으로 퇴근 후 9시, 방구석 배우가 되어 아스뜨로프 대사를 소리 내어 읽는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친구와 얘기하는 기분이 들어 위로가 된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구나.

희곡낭독의 쓸모를 널리 알리려면 내가 낭독한 음성 파일을 들려줘야 하는데 한글 번역본은 저작권 문제가 걸렸다. 러시아어 원문은 저작권 문제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알게 되어 직접 번역해 보기로 했다. AI를 활용해 직역을 하고 어휘를 찾아가며, '가장 적합한 단어'들을 골라내고 있다.

​그리고 상상했다. 아스뜨로프 배역을 누가 맡아야 가장 완벽할까. ​만약 내가 이 연극의 캐스팅 디렉터라면, 1순위는 단연 "손석구" 배우님이다.


그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보여준 그 권태로운 눈빛, 세상만사가 귀찮은 듯 툭 던지는 말투. 그것이야말로 100년 전 러시아의 번아웃 의사, '아스트로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거울 앞에는 초라한 40대 허프로가 서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지독한 권태의 깊이만큼은 나도 손석구 못지않다고 위로하며, 퇴근 후 가장 편한 복장으로 대본을 들고 녹음 버튼을 눌렀다.

​이것은 100년 전의 희곡이지만, 동시에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다.

[음성 파일 추가 예정]
​(여기에 녹음한 오디오 파일 업로드 예정, 편집 중)

​[직역 대본: 날 것의 언어]
​아스트로프: 그래... 10년 만에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어. 그 이유가 뭘까?
너무 일만 했어(Заработался), 유모.
아침부터 밤까지 항상 다리로 뛰어다니고, 휴식이라곤 모르지. 밤에는 이불 밑에 누워서도 두려워해. 혹시 호출이 오지는 않을까 하고.
​게다가 삶 그 자체가 지루하고, 멍청하고, 더럽지...
이 삶이 나를 빨아들여. 주위에는 온통 괴짜들뿐이야. 그들과 2, 3년을 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괴짜가 되어버리지.
​(자신의 긴 수염을 꼬며)
이것 봐, 거대한 수염이 자라 버렸어... 멍청한 수염이지.
나도 괴짜가 되었어, 유모...
아직 멍청해지기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감정들이 어쩐지 무뎌졌어(둔해졌어).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나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중략)...
​내가 앉아서, 눈을 감고 생각했지.
우리보다 100년, 200년 후에 살게 될 사람들, 우리가 지금 그들을 위해 길을 닦고 있는데...
그들이 우리를 좋은 말로 기억해 줄까(Помянут ли)?
​유모, 그들은 기억 안 해줄 거야!

[허배우의 대본 노트 1] : 개인의 번아웃

​1. "원치 않아요 (Не хочется)"
이 짧은 말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다. 번아웃(Burnout)이다. 우리가 회사에서 "점심 생각 없습니다", "개인 사유로 조기 퇴근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때의 그 건조한 마음과 같다. 무언가를 욕망할 에너지조차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2. "멍청한 수염"
거울을 볼 때마다 느끼는 낯설음이다. 회사 일에 치여 정작 나 자신은 돌보지 못한 채 늙어버린 얼굴. '관리되지 않은 수염'은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나만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3. "100년 뒤 누가 기억해 주나?"
20년 넘게 현장을 누비며 길을 닦아왔다. 하지만 내가 은퇴하면 회사가, 후배들이 나를 기억해 줄까?
아스트로프는 "아니요"라고 답한다. 하지만 유모는 말한다. "신(God)은 기억한다"라고.

나는 이것을 이렇게 읽었다. "남들이 몰라줘도, 당신이 땀 흘린 시간과 당신의 '직업적 존엄'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허배우의 대본 노트 2] : 엘레나는 '뮤즈'가 아니라 '동료'다

​《바냐 아저씨》를 다시 읽으며 등골이 서늘했던 건, 남자들이 엘레나를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그들은 유부녀인 엘레나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한다. 그것은 로맨스가 아니었다. 폭력이었다.
​엘레나는 분명히 거절했다. "이런 대화는 고통스러워요", "저를 좀 내버려 두세요."

하지만 남자들은 듣지 않는다. 그들은 엘레나를 '동료'나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의 지루하고 답답한 시골 생활을 환기해 줄 '살아있는 꽃병'이나 '트로피'로만 소비한다.

​조직 생활 20년 차인 내 눈에 그 풍경은 낯설지 않다. 업무적인 파트너로 존중받기보다, 술자리의 안주거리나 호기심의 대상으로 소비되는 여성 직장인들의 모습. 그녀들이 짓던 난처하고 피곤한 표정이 엘레나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체호프가 무서운 작가인 이유는 이것이다. 그는 이 남자들의 행동을 미화하지 않았다. 그저 건조하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권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을 도구화하는 인간의 비열함'을 까발리고 있는 것이다.

[허배우의 대본 노트 3] : 지도를 덮는 순간, 욕망이 방향을 바꾼다

​그렇다면 아스트로프 같은 지식인은 왜 이렇게 무너지는가? 그는 냉소적이지만 무기력하지 않다. 숲을 보존하려 하고, 지도를 그리고, 미래를 상상한다. 그는 단순히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의미'를 구축하려는 인간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는 무너진다.

​1. 욕망의 1단계 — 의미를 향한 욕망
아스트로프의 진짜 욕망은 사랑이나 쾌락이 아니다. 그는 의미를 원한다. "내 삶이 세계에 흔적을 남기길 바란다." 이것은 우리 직장인들이 단순히 월급 때문이 아니라, '내가 기획한 프로젝트가 세상에 통하길 바라는' 인정 욕구와 같다.

​2. 욕망의 2단계 — 좌절
극 중, 그가 열정적으로 지도를 펼쳐 설명할 때 엘레나는 지루해한다. 그 장면은 단순한 대화 실패가 아니다. 욕망의 근간이 흔들리는 순간이다. 내가 10년간 구축한 세계가 타인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인간 내부에서는 조용한 붕괴가 일어난다.

​3. 욕망의 3단계 — 대체 (변질)
그는 지도를 덮는다. 그리고 엘레나에게 끌린다.
흔히 이것을 '타락'이라고 부르지만, 구조적으로 보면 더 단순하다. [의미 욕망]이 차단되니 [쾌락 욕망]으로 급선회한 것이다.

​인간은 공허를 오래 견디지 못한다.
인정받지 못한 열정이 남긴 빈자리는 가장 즉각적인 감각으로 채워진다. 이것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 보존의 메커니즘'이다.

​나 역시 그랬다. 회사에서 내 노력이 부정당했을 때, 나는 퇴근길에 폭식을 하거나 쓸모없는 영상에 집착했다. 그것은 내가 나빠서가 아니라, '의미를 잃은 욕망'이 갈 길을 잃고 비틀거린 흔적이었다.

​[에필로그]
​오늘 밤, 당신에게도 '숨 막히는(Душно)' 순간이 있었는가?


​나의 번역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1막의 권태를 지나, 2막의 분노, 3막의 절망, 그리고 4막의 체념 섞인 위로까지.

나, '허배우'는 이 100년 전의 처방전을 끝까지 내 언어로 옮겨볼 작정이다. 회사원들의 언어로 쓰인, 가장 투박하고 정직한 허배우의 《바냐 아저씨》 완역본.

그 책이 완성되는 날, 당신이 숨 막히는 순간 그 책을 펼쳐주길 바란다. 그때는 우리, 웃으며 건배할 수 있기를.

​[작가 소개] 허배우 (Actorheo)
20년 이상 회사를 다니고 있는 직장인.
낮에는 허프로, 밤에는 러시아 희곡을 번역하고 연기하는 '생활 연기자'입니다. 곧 《바냐 아저씨》 완역을 목표로 쓰고 읽습니다.


[예고편] 다음 이야기: 숨 막히는 삶을 번역하다(3) — 옐레나와 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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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빚어낸, 허배우가 만든 아스뜨로프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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