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스팅 노트] 2026 한국판 《바냐 아저씨》
일러두기: 이 글에서 배우들의 이름 뒤에 별도의 존칭을 붙이지 않은 것은, 그들의 이름이 단순한 인칭대명사가 아니라 이 배역을 설명하는 대체 불가능한 '고유명사'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한국의 배우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며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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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냐 아저씨》 러시아어 원문 번역이 완성되면 1인 다역으로 낭독극을 할 예정이라 등장인물의 말투, 생김새, 행동 등을 떠올려 본다. 그러다 문득 '내가 연출가라면 누구를 무대에 세울까?' 하는 상상으로 이어졌고, 이 캐스팅 노트를 정리해 보았다.
한국 드라마에 《나의 아저씨》 박동훈이 있다면, 러시아 문학에는 《바냐 아저씨》 이반 페트로비치 보이니츠키가 있다. 부디 이 처절하고도 사랑스러운 'R-아저씨' 바냐를 모르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래 캐스팅을 보면, 지금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바냐 아저씨》 대본을 펼치고 싶어질 거라 확신한다.
이것은 체호프의 희곡이자, 오늘을 버티는 우리들의 이야기다.
[제1장: 갈등의 시작 - 억울한 자와 뻔뻔한 자]
1. Иван Петрович Войницкий (이반 페트로비치 보이니츠키 / 애칭: 바냐)
배우: 허성태
대표 이미지: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장덕수' (벼랑 끝에 몰린 자의 독기)
캐스팅 이유:
47세, 25년간의 노동, 그리고 찾아온 배신감. 허성태 배우가 가진 그 '억울한 눈빛'은 국보급이다. 그가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으며 "나는 쇼펜하우어가 될 수도 있었어!"라고 중얼거릴 때, 객석의 모든 40대 가장들은 숨을 죽이고 자신의 지난날을 떠올릴 것이다. 그는 '희극적인 비극'을 완성할 유일한 얼굴이다.
2. Александр Владимирович Серебряков (알렉산드르 블라디미로비치 세레브랴코프 / 퇴임 교수)
배우: 김의성
대표 이미지: 영화 <부산행>의 '용석' (자기만 살겠다고 남을 밀치는 이기심)
캐스팅 이유:
온 집안사람들을 괴롭히는 통풍 환자이자, 지적 허영심으로 똘똘 뭉친 퇴임 교수다. 관객이 보자마자 "저 사람 진짜 얄밉다"라고 느껴야 한다. 김의성 배우는 권위적이면서도 신경질적인, 그리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지식인의 내면을 완벽하게 형상화할 수 있다. 바냐(허성태)가 총을 쏘고 싶어 지게 만드는 '빌런'으로서의 에너지가 확실하다.
[제2장: 흔들리는 마음 - 유혹과 권태]
3. Елена Андреевна (옐레나 안드레예브나 / 교수의 젊은 아내)
배우: 김지원
대표 이미지: 드라마 <눈물의 여왕>의 '홍해인' (차가운 도도함 속에 감춰진 권태)
캐스팅 이유:
그녀는 아름답지만 게으르다. 그저 걷거나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주변 남자들(바냐, 아스뜨로프)을 홀려 파멸시키는 '인어' 같은 존재다. 김지원 배우의 차가우면서도 도도한 눈빛,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권태로움은 옐레나의 이중성을 잘 보여줄 것이다. 그녀가 무대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서 있기만 해도, 극의 긴장감은 팽팽해질 것이다.
4. Михаил Львович Астров (미하일 리보비치 아뜨로프 / 의사)
배우: 손석구
대표 이미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구 씨' (술에 찌든 나른한 섹시함)
캐스팅 이유:
아스뜨로프는 지적인 의사지만, 지방 생활의 권태에 찌들어 술과 냉소에 빠진 남자다. 하지만 여전히 옐레나를 매혹할 만큼 치명적인 매력이 있어야 한다.
손석구 배우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보여준 그 '지쳐있지만 섹시한' 분위기, 그 나른한 딕션이 아스트로프 그 자체다. 그가 "이 지방에는 희망이 없어요"라고 나직이 말할 때, 관객은 그 허무함에 매료될 것이다.
[제3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 위로와 일상]
5. Софь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 / 애칭: 쏘냐)
배우: 전여빈
대표 이미지: 영화 <낙원의 밤>의 '재연' (세상 끝에 선 처연함과 강단)
캐스팅 이유:
쏘냐는 "예쁘지 않다"는 설정이지만, 누구보다 맑고 강인한 영혼을 가졌다. 짝사랑의 아픔을 삼키고 마지막에 바냐를 위로하는 그녀의 눈빛은 깊어야 한다.
전여빈 배우는 화려한 미인이라기보다, 사람의 마음을 끄는 묘한 분위기와 단단한 심지를 가지고 있다. 그녀가 마지막에 "우린 쉴 수 있을 거예요(Мы отдохнем)"라고 독백할 때, 그 울림은 극장을 눈물바다로 만들 것이다.
6. Мария Васильевна Войницкая (마리야 바실리예브나 보이니츠카야 / 바냐의 모친)
배우: 윤여정
대표 이미지: 영화 <미나리>의 '순자' (지적이고 시니컬한 할머니의 아우라)
캐스팅 이유:
하루 종일 정치 팸플릿만 읽으며, 아들 바냐의 고통보다는 사위(교수)의 명성을 더 숭배하는 '지적 허영심' 가득한 노부인이다. 윤여정 배우 특유의 드라이하고 시니컬한 말투로 바냐에게 "장(Jean, 바냐의 애칭), 넌 신념이 부족해"라고 툭 던진다면, 바냐의 속이 뒤집어지는 그 상황이 블랙코미디처럼 살아날 것이다. 그녀는 무대 구석에 앉아 안경 너머로 팸플릿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낼 것이다.
7. Илья Ильич Телегин (일리아 일리치 텔레긴 / 별명: 와플)
배우: 오정세
대표 이미지: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노규태' (밉지 않은 찌질함과 짠내)
캐스팅 이유:
기타를 치며 분위기를 맞추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남자다. 오정세 배우는 웃기면서도 슬픈 연기의 달인이다. 그가 구석에서 눈치를 보며 기타 줄을 튕길 때, 관객은 웃으면서도 짠한 연민을 느낄 것이다.
8. Марина (마리나 / 늙은 유모)
배우: 김미경
대표 이미지: 드라마 <웰컴투 삼달리>의 '고미자' (모든 것을 품어주는 억척스러운 엄마)
캐스팅 이유:
이 집안의 유일한 안식처다. 바냐와 아스뜨로프를 아이처럼 다루는 따뜻한 어머니 같은 존재다. 김미경 배우가 주는 '국민 엄마'의 투박하고 따뜻한 질감은, 이 차가운 집안의 공기를 데워줄 난로와 같다.
[허배우의 코멘트]
이 조합이라면, 굳이 대사를 외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배우들이 무대 위에 앉아 차를 마시고, 서로를 외면하고, 한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삶이라는 고통과 권태"가 완벽하게 표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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