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끝까지 일해야 하는가
1. 노동은 저주인가, 구원인가
퇴근 후 밤늦게까지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를 번역하고 있다. 러시아어 원문을 한 줄 한 줄 옮기다 보면, 유독 자주 마주치는 단어가 있다. 바로 '델로(Дело)', 즉 '일(Work)'이다.
이 희곡의 주인공인 47세 바냐는 평생을 매형(교수)의 뒷바라지를 위해 영지를 관리하며 노동했다. 그러나 그 노동의 대가로 돌아온 것은 "당신은 껍데기야!"라는 깨달음뿐이었다.
바냐는 절규한다. "나는 기계처럼 일만 했어! 내 인생은 어디로 갔지?" 여기까지만 보면 노동은 인간을 소모시키고 배신하는 저주처럼 보인다.
22년 차 직장인인 나 역시 때로는 바냐의 그 비명에 깊이 공감한다. 회사에서의 평가(고과)가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반복되는 업무가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모두 마음속으로 총을 쏘고 싶어 지니까.
2. 교수의 명령 vs 소냐의 기도
흥미로운 점은 이 희곡의 결말부에서 '일(Work)'이라는 단어가 전혀 다른 두 가지 맥락으로 쓰인다는 사실이다.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떠나는 세레브랴코프 교수는 남겨진 가족들에게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이렇게 훈계한다.
"여러분, 일을 하십시오! (Надо, господа, дело делать!)"
나는 번역하는 내내 이 대사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불편하게 다가왔다. 내가 너무 가혹하게 읽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평생 펜대만 굴리며 처남과 딸의 등골을 빼먹은 그가 말하는 '일'이란, 자신의 품위 유지를 위해 돈을 부치라는 착취의 언어이자, 무너진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위선적인 훈계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짜 노동'이다.
반면, 교수가 떠난 뒤 절망에 빠진 바냐에게 소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일해야 해요. (Мы должны трудиться.)"
똑같은 "일하자"는 말이지만, 소냐의 말은 명령이 아니라 기도였다. 슬픔을 잊기 위해, 무너진 일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그리고 서로를 살리기 위해 몸을 움직이자는 '진짜 노동'의 선언이었다.
3. 늙어감의 공포는 '빈곤'이 아니라 '무용함'이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늙어가고 있다. 고령화 사회의 위기는 단순히 연금 고갈이나 의료비 증가 같은 경제적 숫자에만 있지 않다. 진짜 위기는 은퇴 후 찾아오는 '영혼의 빈곤', 즉 교수의 말처럼 누군가에게 착취당하거나 혹은 사회로부터 "더 이상 당신은 필요 없다"는 선고를 받는 '무용함'의 공포다.
바냐가 무너졌던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다. "내 노동이 가짜를 위한 것이었다니!" 자신의 쓸모가 부정당했을 때 인간은 병든다.
우리가 노년에도 일해야 하는 이유는 교수의 명령(경제적 생산성) 때문이 아니라, 소냐의 기도(삶의 존엄성) 때문이다. 인간은 쓸모를 느낄 때 비로소 인간으로 남는다.
4. 바냐 아저씨에게 '소냐의 일자리'를 허하라
따라서 우리 사회가 노인들에게 제공해야 할 일자리는 단순히 용돈 벌이를 위한 고역이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소냐의 일자리'다.
소냐의 노동이 현대 사회에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최근 일본에서 화제가 된 '할머니 메이드 카페'는 좋은 사례다. 이 카페의 메이드들은 20대가 아닌 70대 할머니들이다. 그들은 젊은 메이드들처럼 억지스러운 애교를 부리는 대신, 인생의 연륜이 묻어나는 투박한 손길로 주먹밥을 쥐어주고 손님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며 등을 두드려준다.
손님들은 그곳에서 고향의 따스함을 느끼고, 할머니들은 젊은이들과 눈을 맞추며 자신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임을 확인한다. 이것이야말로 바냐와 소냐가 밤새워 장부를 정리하며 찾으려 했던, 서로를 살리는 '진짜 노동'의 모습이 아닐까.
거창한 부를 창출하지 않아도 좋다. 나의 손과 머리를 움직여 어제의 무질서를 오늘의 질서로 바꾸는 행위, 누군가에게 작은 온기라도 건넬 수 있는 역할이면 충분하다.
동네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일, 텃밭을 가꾸어 이웃과 나누는 일, 혹은 늦깎이 배우가 되어 체호프의 대사를 읊어보는 일...
이 모든 '델로(일)'가 그들에게는 삶을 지탱하는 지팡이가 된다. 일의 리듬만이 삶의 공백을 조용히 메운다.
5. 맺으며: 그래도 살아야 하기에
체호프의 희곡은 비극으로 시작해 일상의 숭고함으로 끝난다. 나 역시 연휴가 끝나면 다시 사무실로 출근해 엑셀 파일을 열 것이다. 때로는 그 일이 지겹고, 때로는 교수의 훈계처럼 느껴질지라도, 나는 계속 일할 것이다.
일하는 행위 자체가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맥박이기 때문이다.
먼 훗날, 내가 은퇴하여 진짜 노인이 되었을 때도 나는 무언가를 하고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번역이든, 연기든, 아니면 작은 화단을 가꾸는 일이든. 그리하여 생의 마지막 순간, 소냐의 대사처럼 담담하게 말할 수 있기를.
"우리는 일했고, 고통받았고, 그래도 살아내었노라고."
여한 없는 삶을 살고 싶다.
퇴근 후, 듀오링고와 씨름하며 러시아어를 배운다.
남들이 보기엔 하찮은 게임처럼 보일지라도, 나에게는 삶을 붙들어 주는 가장 즐거운 노동이다.
옆에서 아들이 묻는다.
“엄마 게임해요?”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게임 아니야. 러시아어 공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