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냐 아저씨》 명대사 러시아어 필사 명상

​구정 연휴의 마지막 날 마음 다스리는 중, 우린 쉬게 될 거예요

by 허배우 actorheo

​긴 연휴의 끝자락, 고요한 밤이다. 2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해오고 있지만, 명절 연휴의 마지막 날은 늘 아쉬움과 묘한 중압감이 교차하곤 한다. 내일부터 다시 시작될 치열한 일상을 마주하기 전, 요동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아 조용히 펜을 들었다.

​요즘 내 마음을 가장 깊게 어루만져 주는 문장을 꺼낸다.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조카 소냐의 대사다.

​"Мы отдохнем! (믜 아뜨다흐뇸!)"
"우린 쉬게 될 거예요!"

​러시아어 원문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종이에 눌러써 내려간다. '다리 달린 집'처럼 생긴 인쇄체와 둥글둥글한 영어 'g'를 닮은 필기체 사이를 오가며 알파벳 'Д(데)'를 그리는 동안, 마음속의 어지러운 생각들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사각거리는 펜촉의 마찰음은 그 자체로 훌륭한 명상 음악이 된다.

​희곡을 번역하고 낭독하며 수없이 입 밖으로 내어본 대사지만, 직접 손으로 필사하는 느낌은 또 다르다. 고단하고 팍팍한 삶을 묵묵히 견뎌낸 이들에게 주어지는 궁극적인 안식. "우린 쉬게 될 거예요"라는 담담한 선언이, 내일 당장 출근길에 올라야 하는 나에게 이상하리만치 큰 위로로 다가온다.

​사실, 이렇게 밤을 지새우며 낯선 러시아어 필사에 매진하는 데에는 나만의 또 다른 작은 이유가 있다.

​내 브런치를 찾아주는 소중한 구독자분들이 어느덧 100분을 향해 가고 있다. 평범한 40대의 끄적임에 공감해 주고, 귀한 시간을 내어 글을 읽어주는 분들께 어떤 방식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깊이 고민했다.

​그래서 작지만 내 온기가 오롯이 담긴 '손글씨 키링'을 직접 만들어 선물하기로 했다. 투박할지라도 디지털 글자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아날로그의 정성을 담고 싶었다. 100번째 인연이 닿는 날 독자들의 일상에 작은 위안을 쥐여줄 수 있도록, 오늘도 이렇게 문장을 반복하며 묵묵히 연습을 거듭하는 중이다.

《바냐 아저씨》 러시아어 원문 필사 놀이

​이 영상 속 사각거리는 작은 소리가, 연휴 마지막 날 밤을 보내고 있을 누군가의 고단함도 잠시나마 씻어내 주기를 바란다. 혹시 키링에 담겼으면 하는 체호프의 다른 문장이나, 각자에게 위로가 되는 문장이 있다면 댓글로 살짝 귀띔해 주어도 좋겠다. 손끝에 정성을 담아 연습해 볼 테니.

​치열한 내일을 살아낼 우리 모두, 결국에는 평안하게 쉴 수 있을 테니까.


Мы отдохнем!

​[에필로그] 감동 파괴 주의
​내 글씨가 너무 예술적이었던 걸까? 명상을 마치고 번역기를 슬쩍 돌려보았더니, 첫 줄부터 엄청난 오역이 등장했다.

​"우리 오트, 덤벼들 거야!"

​순식간에 위로의 대사가 정체불명의 오트를 향한 선전포고가 되어버렸다. 쉬고 싶어서 펜을 들었는데, 갑자기 어디로 덤벼들라는 건지. AI도 명절 연휴가 끝나는 게 억울해서 반항을 하나 보다. 완벽한 휴식을 위해, 손글씨 연습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것 같다.

P.S. 손글씨 키링 발송 이벤트 진행 공지는 팔로워 100분이 채워지면 따로 정식으로 올릴 예정입니다. (오해 마세요, 강제 배송 아닙니다. 팔로워분들 중 원하시는 분에 한해 발송할 예정입니다. 하하. 덤벼들지 않고 얌전하게 잘 써서 보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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