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를 읽는 감각》 01 인생은 에이밍이다

희곡으로 해부한 조직과 권력의 기울기

by 허배우 actorheo

[프롤로그] 인생은 에이밍이다, 내가 서 있는 무대의 판을 읽어라
​: 모르는 게 약이라는 비겁한 거짓말


​나는 20년 이상을 뼈 빠지게 일했지만, 내 청춘은 '하위 고과'라는 점수 한 줄로 처참하게 정리됐다.


낮에는 거대 기업의 회의실에 앉아있는

조연이지만, 퇴근 후 9시 방구석에서 내가 안톤 체호프를 연기하는 이유다.


​어릴 적 어른들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얄궂은 질문을 던지면, 나는 언제나 눈치를 보며 “엄빠”라고 답했다. 누구 하나 서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그 '착한 모범생'의 기질은 내 20대와 30대를, 아니 회사 생활 20년 전체를 지배했다.


​회사에서의 '엄빠 딜레마'는 잔혹했다.
그것은 주로 직속 상사와 그 위 상사(임원)의 오더가 충돌할 때 극에 달했다. 중간에 낀 나는 매일같이 "엄빠"를 외쳤다. 직속 상사의 체면도 살려주고 윗선의 지시도 막아내기 위해 내 뼈를 갈아 넣으며 무거운 가방을 든 윌리 로먼처럼 뛰고 또 뛰었다.


​대학교 4년 내내 휴학 한 번 없이 2전공과 1부전공을 해치웠고, 졸업식도 하기 전인 2003년 1월의 찬 바람을 맞으며 회사에 조기 입사했을 때부터 내 인생에 '일시 정지' 버튼은 없었다.


2005년 연애, 2008년 결혼, 연이은 두 아이의 출산 속에서도 어떻게든 이 피 말리는 '상사들의 게임'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비극은 언제나 착한 배역의 몫이었다. 책임의 화살이 날아오는 위기가 닥치자, 나는 철저하게 양쪽 모두에게 팽(烹)당했다. 두 상사 사이에서 완충재 역할을 자처했던 나는 가장 완벽한 총알받이가 되어 있었고, 그 대가로 날아온 것은 '하위 고과'라는 차가운 청구서였다.


​20년의 헌신이 철저히 부정당했다는 배신감과 수치심. 스스로가 거대 조직의 '쓸모없는 부품'으로 전락했다는 자괴감에 나는 한동안 심정적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그날 처음으로, 회사에서 나는 철저히 아무도 아니었다.


​핑계를 대자면 그랬다. 내 눈앞에 놓인 공을 쳐내기 바빠서, 이 게임의 룰이 무엇인지, 내가 서 있는 판이 어떤 판인지 '예측'해 볼 여유조차 없었다고. 흔히들 말하지 않는가.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뒤로 숨기 위한 비겁한 거짓말이었다.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격 폼이나 비거리가 아니라 '에이밍(Aiming, 방향 설정)'이다. 스크린 골프장에서는 기계가 방향을 잡아주지만, 거친 필드에 나가면 오롯이 내가 서 있는 땅의 기울기(구조)를 읽고 에이밍을 잡아야 한다.


방향을 읽지 못한 채 양쪽의 눈치만 보며 따박따박 쳐낸 공은 결국 해저드로 빠질 뿐이다. 나 역시 게임의 기울기를 읽어낼 힘이 없었기에 그토록 무기력하게 휘둘렸던 것이다.


​그 맹목적인 달리기에 제동이 걸린 것은 코로나 시기였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된 둘째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온라인 수업을 받아야만 했던 그때, 나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2년간의 육아휴직을 냈다.


​그 멈춤의 시간 속에서 나는 비경쟁 독서토론에 참여하며 고전 문학의 텍스트를 '낭독'하고 '필사'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아닌 직원'이라는 참담한 무력감 속에서 가장 먼저 내 목소리를 빌려준 인물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속 '윌리 로먼'이었다. 평생을 바쳐 헌신했지만 결국 버림받고 쓸쓸한 죽음을 택한 늙은 영업맨. 그의 무거운 가방은 곧 나의 가방이었고, 그의 비극은 내 20년의 결말 같았다.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대본을 읽어 내려가며 나는 결심했다. 나는 윌리처럼 무대 뒤로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는 파국이 아닌, 기어코 버텨내는 '생존'의 대본이 필요했다.


​그 간절함이 나를 19세기 러시아,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로 이끌었다. 나는 <바냐 아저씨> 대본을 펼쳐 우리를 괴롭히는 상사와 동료들을 수술대 위에 올리고 해부했다. 25년 영지를 지켰지만 토사구팽 당하는 바냐, 번아웃에 시달리는 아스트로프의 모습은 21세기 우리 사무실의 뼈대와 소름 돋도록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비극 속에서도 기어코 살아남아 영수증을 정리하며 삶을 이어간다.


​직장이라는 무대에서 상처받지 않을 도리는 없다. 하지만 상사들을 나를 버린 ‘악당’이 아니라 각자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배역’으로 떼어놓고 구조를 읽으면, 우리는 내 에너지를 보존하는 나만의 가면을 쓸 수 있다.


​이 책은 당신이 그 가면을 단단히 벼려낼 수 있도록 세 가지 실전 무기를 쥐여줄 것이다.


첫째, 상사의 독설 뒤에 숨은 진짜 의도(KPI)를 간파하는 '대사 해석법'


둘째, 누가 이 무대의 진짜 조명을 독점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사내 권력 지도 그리기'


셋째, 나의 헌신이 매몰비용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평가(고과) 시즌에서 나를 지키는 생존법'이다.


​나는 앞으로도 두 상사가 충돌하는 딜레마의 순간이 오면 똑같이 “엄빠”라고 답할 것이다. 그것이 내 기질이자 삶의 방식이니까.


단, 예전처럼 심정적으로 휘청이거나 배신감에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희곡의 인물들을 통해 '구조 독법'의 렌즈를 낀 나는 이제 이 판의 생리를 안다. 내가 선택한 결과에 대해서는 기꺼이 감당하되, 그것을 상처가 아닌 나의 데이터와 자산으로 삼아 덜 휘둘리며 전진할 것이다.


​자, 이제 막을 올리기 전 당신에게 마지막 경고를 전한다.


모르고 일하면, 당신도 언젠가 조용히 정리 대상이 된다.


​이 책에 담긴 '구조 독법(讀法)'을 한 번이라도 익히고 나면, 당신은 두 번 다시 예전처럼 순진하게 조직에 충성하고 방향 없이 소모되는 '착한 배역'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회사가 숨기고 싶어 하는 무대 뒤의 진실.
그 차가운 구조를 마주하고 기꺼이 내 삶의 에이밍을 다시 잡을 용기가 있는 분들만 이 연극의 첫 페이지를 넘겨주기를 바란다.


​떨리는 낭독으로 시작해 날카로운 해부로 끝나는 이 지독한 연극에서, 오늘보다 한결 단단해진 당신을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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