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를 읽는 감각》 02 승진이 막힌 밤 9시, 나는

나는 희곡을 펼쳤다 : 회사라는 무대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위하여

by 허배우 actorheo

이십여 년을 조직에서 일했다. 처음 명함을 돌리던 시절, 배역은 분명했다. 지시를 실행하고, 실적으로 증명하면 다음 장이 열렸다. 조명은 위로 이동했고, 그 질서는 꽤 공정해 보였다.

고연차가 되자 흐름이 멈췄다. 승진은 더 이상 예정된 장면이 아니었다. 나는 위와 아래의 압력을 흡수하는 위치에 놓였다. 무대는 조용히 재편되었고, 어느 날 ‘최하위 고과’가 내려왔다.

실패라기보다 신호에 가까웠다.
이제 다른 배우를 올리겠다는.

대본이 끊긴 배우는 과거의 박수를 복기하거나, 냉소로 버틴다. 대체로 둘 다 오래가지 않는다.

어느 밤, 희곡을 펼쳤다. 소리 내어 읽었다.
그때 알았다. 밀려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격려가 아니라 거리라는 것을.

1. 나를 관객석에 앉히는 연습

조직에서 밀려나면 억울함이 먼저 올라온다.
투입한 시간과 결과가 비례하지 않는다는 감각.
낭독을 시작하면 시점이 이동한다.

나는 무대 위 인물이 아니라 관객석의 시선으로 장면을 본다. 조명이 향하는 자리와, 힘을 갖는 대사를 구분하게 된다.

바냐 아저씨의 바냐는 25년을 헌신하지만 보상받지 못한다. 그의 좌절은 성격의 결함이라기보다 구조의 귀결에 가깝다.

읽다 보니 이해했다.

내 인사 평가는 존재의 총합이 아니라, 한정된 자리를 배분하는 방식의 결과라는 것을. 감정은 해석되는 순간 온도가 내려간다.

2. 분노를 소모하는 기술

이해했다고 해서 감정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잔열은 남는다. 고연차는 쉽게 화낼 수 없다. 분노는 곧 리스크가 된다.

낭독은 예외다.

세일즈맨의 죽음의 윌리 로먼을 소리 내어 읽는다.
“나는 평생을 이 회사를 위해 뛰었어.”
문장이 공기를 통과하는 동안 감정도 빠져나간다.
활자는 안전한 배출구다. 대상이 특정되지 않기에 누구도 다치지 않는다.

감정은 저장하면 왜곡되고, 소모하면 가벼워진다.
낭독은 조용한 소모 방식이다.

3. 가면을 관리하는 법

문제가 깊어지는 지점은 회사를 자아와 동일시할 때다. 평가가 곧 정체성이라는 전제가 깔리는 순간, 고과는 존재의 판정이 된다.

배우는 배역과 자신을 구분한다. 몰입하되 귀속되지는 않는다. 아침에 회사 문을 열면 나는 역할을 수행한다. 요구된 만큼 말하고, 필요한 만큼만 개입한다. 조명이 닿지 않는 곳까지 서 있으려 애쓰지 않는다.

밤 9시, 집으로 돌아오면 역할을 벗는다.

회사와 나를 분리하는 일은 태도가 아니라 기술에 가깝다.

조명은 이동한다.
무대 중앙은 순환한다.
대본이 멈춘 것은 회사 쪽이다.
나는 다른 장면으로 이동하면 된다.
인생의 대본은 한 권이 아니다.


#희곡낭독 #직장인 #허배우 #actorheo #오피스드라마테라피 #중년 #고연차 #조직구조 #구조을읽는감각 #번아웃극복

매거진의 이전글​《구조를 읽는 감각》 01 인생은 에이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