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희곡 처방]​​​죽는게 더 나은 경우는 없네

《세일즈맨의 죽음》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정말 더 중요한가(음성 포함)

by 허배우 actorheo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몫의 자존심을 품고 산다. 그것은 쉽게 구겨지지 않으려는 마음이고, 함부로 무너지지 않으려는 마지막 버팀목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자존심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중요한 감정이다.

누군가에게 업신여김 당하지 않으려는 마음, 내 삶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 끝까지 나를 나로 남게 하려는 마음은 분명 소중하다.

그러나 자존심은 이상하게도 사람을 가장 강하게 만드는 동시에 가장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 때로는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지만, 어떤 순간에는 가장 필요한 손길마저 밀어내게 만드는 벽이 되기도 한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바로 그 위태로운 경계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윌리와 찰리, 두 인물이 서 있다.

​윌리는 늘 성공을 꿈꾸는 사람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면 삶도 저절로 풀릴 것이라고 믿고, 인정받는 인생이야말로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현실보다 자신이 믿고 싶은 모습을 더 오래 붙든다.

반면 찰리는 조용하다. 화려한 말도 없고, 대단한 포부를 떠벌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는 현실을 아는 사람이다. 삶이 무엇으로 굴러가는지, 사람이 어떻게 버티는지, 꿈만으로는 내일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민음사 세일즈맨의 죽음 116~117쪽

윌리와 찰리의 대화 허배우의 낭독]

그래서 찰리는 윌리에게 돈을 빌려 주고, 일자리까지 제안한다. 그 제안에는 우월감도 없고 동정의 과장도 없다. 오히려 오래된 친구가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다정한 방식의 연대가 있다.

하지만 윌리는 그 손을 끝내 제대로 잡지 못한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처지보다,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자신을 더 견디지 못한다. 가난보다도 초라해 보이는 순간이 두렵고, 실패보다도 실패를 인정하는 장면이 더 무서운 사람처럼 보인다.

​나는 이 장면이 《세일즈맨의 죽음》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아픈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그렇게까지 수치스러운 일일까.

자존심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정말로 지켜야 하는 것은 내 삶일까, 아니면 남들 앞에서 무너지지 않은 척하는 마지막 표정일까.

​윌리에게 자존심은 존엄이라기보다 체면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도움은 회복의 기회가 아니라 패배의 증거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진짜 존엄은 완벽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흔들리고, 누구나 한 번쯤은 타인의 손을 빌려야 하며, 누구나 제 힘만으로는 버틸 수 없는 시간을 통과한다. 그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인간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현실 앞에서 더 단단하다.

끝까지 괜찮은 척하는 사람보다, 괜찮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용기 있을 때도 있다. 윌리가 끝까지 붙든 것은 자존심이라기보다 허상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삶을 구할 수 있는 사다리 앞에서, 남들이 보는 자신의 높이를 먼저 계산했다. 그리고 바로 그 계산이 그를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찰리는 그래서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는 이 작품 속에서 큰소리치지 않지만, 삶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가 있는 인물이다.

찰리는 윌리가 평생을 바쳐 좇는 ‘외양’과 ‘허세’가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꿰뚫어 보면서도, 결코 그를 멸시하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얄팍한 자존심 밑에 깔린 지독한 공포와, 무너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초라함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묵묵히 품어준다.

매주 50달러씩 빌려주면서도 윌리가 그것을 가족들에게 '급여'라고 거짓말하는 것을 모른 척 넘어가 주는 대목이 그렇다. 누군가의 부족함을 한낱 초라함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면, 이처럼 상대의 결핍까지 온전히 품어내며 그 존재를 삶의 끈 쪽으로 다정하게 당겨주어야 한다.

찰리가 내민 손길은 단순한 동정이나 우월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이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실을 아는 자의 가장 묵직하고도 따뜻한 연대였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자연스럽게 나 자신의 질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나라면 친구의 도움을 받는 것이 자존심이 상할 때, 무엇을 선택할까.

아마 나 역시 순간적으로는 마음이 상할 것이다.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질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기대야 하는 처지가 작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자존심보다 관계와 현실을 지키는 쪽을 택하고 싶다. 왜냐하면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내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말 힘든 순간에 솔직해지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용기라고 믿는다. 끝까지 괜찮은 척하며 버티는 일은 멀리서 보면 강해 보일 수가 있다.

그러나 그 강함이 나를 점점 더 고립시키고, 정작 필요한 순간에 아무도 곁에 남지 않게 만든다면 그것은 강함이 아니라 무너짐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물론 모든 도움을 다 받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을 깎아내리거나 빚진 마음으로 눌러앉게 만드는 도움은 오히려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다. 그런 도움이라면 거절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라며 내미는 손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런 손길을 붙잡는 일은 결코 비굴한 일이 아니다. 진정한 자존심은 끝까지 혼자 버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아도 내 존재의 가치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넘어질 수 있지만 끝난 사람은 아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마음이야말로 건강한 자존심 아닐까.

​그래서 《세일즈맨의 죽음》은 단순히 한 세일즈맨의 몰락을 그린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오래된 질문 하나를 건넨다.

우리는 정말 무엇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가.

내 삶을 지키고 있는가, 아니면 내 삶이 괜찮아 보인다는 인상만 지키고 있는가.

요즘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힘들어도 괜찮은 척하고, 무너져도 멀쩡한 척하고, 도움이 필요해도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 한다.

직장에서도, 관계 속에서도, 일상에서도 우리는 종종 실제의 나보다 보이는 나를 더 열심히 관리한다. 그러는 동안 삶은 점점 더 지쳐 가고, 마음은 더 쉽게 고립된다.

​작품의 마지막, 아무도 찾지 않은 윌리의 장례식에서 찰리가 남긴 진혼곡은 이 비극이 던지는 질문의 묵직한 마침표와 같다.

“누구도 이 사람을 비난해선 안 돼. 세일즈맨은 꿈을 꿔야만 하는 직업이야. 그건 이 세계의 법칙 같은 거지.”

찰리는 윌리의 비극이 단순히 개인의 어리석음 때문만이 아니라, 언제나 웃는 얼굴로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야만 살아남는 잔혹한 숙명 때문임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찰리의 이 조용한 애도가 더욱 뼈아픈 이유는, 윌리 곁에 이미 그를 살릴 수 있는 사랑과 연대가 충분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미쳐가는 남편의 존재 자체를 무조건적으로 안아주는 아내 린다가 있었고, 밑바닥까지 추락한 현실에 기꺼이 사다리를 내려주는 친구 찰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윌리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의 병든 자존심이 '성공하지 못한 자신'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대를 감당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는 찰리의 밑으로 들어가 평범하고 초라한 현실을 사느니, 자신의 목숨을 던져 2만 달러짜리 생명보험금을 남기는 '위대한 세일즈맨'으로 죽는 길을 택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곁에 머무는 법을 몰랐기에, 끝내 삶이 아닌 완벽한 허상 속으로 몸을 던진 것이다.

​자존심은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자존심이 친구의 진심, 가족의 손길, 다시 살아 볼 기회마저 밀어내게 만든다면 그때의 자존심은 더 이상 존엄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는 갑옷이 아니라 자신을 가두는 방이 된다.

윌리는 그 방 안에 너무 오래 머물렀고, 찰리는 그 문을 열어 주려 했던 사람이다. 사람은 얄팍한 체면이나 허상으로는 살 수 없고, 결국 찰리가 보여준 사랑과 연대, 그리고 현실 감각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이 조용한 애도는 말해주고 있다.
[오늘의 희곡 처방]
​결국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늘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내는 일이다. 무너지지 않은 척하는 일이 아니라, 무너질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일이다.

혼자 버티는 일이 아니라, 때로는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 다시 앞으로 걸어가는 일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윌리가 놓친 것은 단순한 체면이 아니라 삶을 이어 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용기였다. 반대로 찰리가 보여 준 것은 대단한 성공의 철학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에게 기꺼이 기대며 살아갈 수 있다는 조용한 진실이었다.

​진정한 자존심은 도움을 거절하는 데 있지 않다. 도움을 받아도 나 자신을 잃지 않고, 다시 살아갈 힘으로 바꾸는 데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끝내 지켜야 할 가장 단단한 품위인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늘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내는 일이다. 남편과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봄날의 벚꽃길을 오래도록 산책하는 일, 아이들이 자라 가정을 꾸리고 새 생명을 안겨주는 기적을 보기 위해 끝내 곁에 살아남는 일. 무너지지 않은 척하는 일이 아니라, 무너질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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