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힘든 한 달을 보냈다.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갔고, 그 가운데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이 진짜인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낯선 내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숨어버리고 싶은 적이 많았고, 답답한 공간에 있을 때면 어딘가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기만 했던 시간이었다.
누군가의 관심이 부담스러웠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시선들이 무섭게만 느껴졌고, 너무 빠른 시간에 친밀하게 다가오는 것이 의심스러웠다. 어디에서부터 문제였던 걸까? 오히려 내가 그토록 바랐던 것들이 아니었나?
1. 간절했으나 참혹했던 음악영화
돌아보면 10월 한 달은 정말 바쁘기도 했다. 첫 날부터 평소에 그토록 원했던 음악영화 오디션을 보게 될 기회가 왔으나 배우가 아닌 안무팀으로 연락이 온 것이다. 몸치이고 춤을 못 추는 내가 이전에 창작 뮤지컬을 했을 때 이미 한계를 경험했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도전해보고 싶었다. 안무팀으로라도 음악영화 현장에서 함께 호흡하고 엔딩크레딧에 올라가고 싶었던 마음.
하지만 오디션은 늘 그렇듯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수많은 댄서들 사이에서 나는 이미 심사위원들에게 최하위 등급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등급별로 나뉜 걸 알게 된 이후 자신감은 한없이 떨어졌고 나 자신이 형편없이 부족한 자로 보였으며 배우가 아닌 춤추는 사람으로 평가받는 상황이 뭔가 불편하고 속상했다. 다이어트 때문에 이미 체력은 많이 저하된 상태였지만, '역시 경력 없는 배우는 안된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나 자신에게 칭찬해주고 싶은 마음만 가지고 돌아왔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는 눈물을 펑펑 쏟고 싶었지만, 다음날 있을 영화 촬영 때문에 참고 또 참았다.
2. 안녕하세요! 배우 장세아입니다.
바로 다음날, 영화 촬영 현장에서도 쉽지 않은 상황들의 연속이었다. 그 누구도 내가 엄마 역으로 출연하는 것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한 상태였고, 에이전시 실장님은 출연자들 관리하느라 연락이 잘 닿지 않던 상태. 스태프분들 한 분 한 분께 허리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듯 여쭙고 또 여쭤서 의상팀과 인물 조감독님까지 겨우 연락이 되어 만나 뵙게 되었다. 배역도 그 자리에서 알게 된 것에 대해 당황스럽기도 했으나, '내가 출연하지 않은 날에 연락받고 나온 것은 아니구나'라는 안도감에 마음을 한시름 내려놓기도 했다.
그 이후 오랜 시간 촬영 대기를 하면서 13시간 동안 유령인 듯 존재감 없는 사람처럼 대하기도 하시고, 주연배우들과 함께 촬영하는 씬에서는 나를 배우가 아닌 엑스트라로 소개하시는 제작자분의 말씀에 너무 속상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만 하는 내가 참 안타깝게 보였다. 한 두 번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더 열심히 경력을 쌓아서 나를 아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3. 배우로서의 불안감
필라테스 센터에서는 갑작스러운 오후 매니저의 부재로 인해 3주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느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점점 지쳐갔다. 업무가 엄청 힘든 것도 아니고, 선생님들이 나를 지치게 하는 것도 아니지만 내 본업이 아닌 다른 업무에 이 많은 시간을 쏟는다는 게 스트레스가 점점 더 쌓여갔고, 이러다가 배우 일을 다 놓쳐 버리면 어떡할까, 작품을 많이 하고 싶지만 더 이상 불러주시지 않으면 어떡할까 라는 불안감이 늘 맴돌았던 것 같다.
4. 안식처는 어디인가요
이런 상황 가운데 집에서도 쉴 수 없었다. 조카 육아를 전적으로 담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는 소리와 악지르는 소리에 점점 예민해지기 시작했고, 가족 중 누구든 시간이 되는 사람은 조카의 어린이집 등원을 책임져야 하고 동생이 집에 없을 때는 조카를 봐줘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매 순간 자유롭지는 못 했다. 10월 둘째 주까지는 심리상담을 통해 지친 마음을 자주 위로받거나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지만, 심리상담도 12주 차가 끝나게 되면서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5. 낯선 모습, 벼랑 끝에서
이 모든 상황들이 내게는 감당하기가 어렵고 지쳤던 상태였나 보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고, 위로받거나 작은 공감이라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평소보다 두 배, 세 배 이상 밝은 모습으로 다가갔고 장난도 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런 내 모습을 마주하면서 학창 시절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재밌기도 했지만, 점점 괴리감이 느껴졌다. 진짜 내 모습이 맞나, 오히려 이게 훨씬 더 가식적이고 포장된 모습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낯을 많이 가리기도 하고 내 첫인상이 차갑거나 쌀쌀맞아 보인다고, 결코 평범하지 않고 다가가기 힘든 사람이라는 얘기를 워낙 많이 들어서 그렇게 비치지 않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이상을 보여주려고 하니 스스로 금방 지쳐버리게 되었고, 낯선 내 모습을 보면서 자꾸 도망가고 싶었다. 스스로를 회피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사실을 자꾸 상황 탓이나 타인의 문제로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 우울한 마음과 스스로를 옭아매는 상황 속에서 자신을 더 세밀하게 바라보고 깨달은 후 빠져나올 수 있었어야 했는데 결국 내 모습의 밑바닥까지 보게 되면서 벼랑 끝으로 추락하게 된 상황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나를 아껴주고 친절하게 대해주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단기간에 가까워진 사람들이 단 한 번도 없었고, 나 역시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사람들을 항상 오래 보고 친해지는 편이기 때문에 금방 가까워진 그들을 나도 모르게 의심하고 있었나 보다.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한 명에게 내 감정과 어려움을 속사포처럼 쏟아내기 시작하더니, 결국 그렇게 마음을 털어놓게 된 사람들이 둘이 되고 셋이 되고 넷이 되면서 나도 모르게 여러 명을 모함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시작된 건 아니었고, 너무 힘들어서 이런저런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혼란 가운데 하루하루 바뀌는 내 감정과 쏟아낸 말이 모두 거짓말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참 나약하고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상대방의 감정이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내가 그들을 신뢰하고 좋아한다는 마음만으로 내 모든 마음을 다 쏟아냈던 지난날을 돌아보니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 들겠고 바보 같기도 하다. 사춘기도 아닌데 정체성의 혼란을 마주하고,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을 그들에게 그대로 투사해버려서 죄책감을 돌려버리다니. 다른 이들이 내 호의를 받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그들이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모습이 두려웠고 낯선 내 모습이 두려웠던 것이었는데... 내가 가지고 있던 그 두려움을 왜 다른 사람들에게로 화살을 돌려버렸던 것일까? 혼자서 영화 한 편을 찍는 것도 아닌데 온갖 상상력으로 시나리오 한 편을 완성한 것처럼.
결국 많은 이들에게 부정적인 말과 행동으로 실망감만 가득 주게 된 내 모습이지만,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아졌다는 것도 사실 놀랍기만 하다. 원래 내 속마음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꽁꽁 숨겨두기만 했었고 가족들에게도 절대 얘기하지 않던 나였다. 하지만 그들은 내 부족함도 이해해주려고 노력했고, 이미 지쳤지만 들어주려고 하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적절한 선을 지키지 못했고,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내면서 소중한 것들을 다 나눠주려고 했다. 오히려 가족들보다도 편했던 사람들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기대하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행동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한 명 한 명에게 애정과 신뢰를 가득 담고 있었던 것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마음이 복잡하고 어렵고 두려웠다. 많은 이들이 나를 싫어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며칠간 잠을 못 잤고 입맛도 없었다. 그 마음이 가득하다 보니 어떤 말을 봐도 다 나를 향해 독설을 퍼붓는 것 같고,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무리가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마지막까지 냉랭하게 대했던 그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 나와 가장 가까워진 것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그 사람들이 전부 등을 돌린 것 같다는 배신감에 너무 속상하고 마음이 아팠다. 나만 그 공간에서 나가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 같았다. 나만 사라지면 모든 사람들이 다 편하게 잘 지낼 것 같고, 좋아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6. 장세아, 나를 찾아줘
일주일 하고도 3일이 지난 지금 이제야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까지 몇몇 단체 생활에서 잘 버티지 못할 때의 내 모습을 돌아보면 늘 비슷한 문제들이 있었다. 누군가 나를 무시하고 싫어한다는 생각, 나와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인 것 같다는 생각, 무슨 문제가 있어서 나를 내쫓으려고 한다는 생각. 이게 늘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고, 이번에도 역시나 동일한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다가 정말 솔직하고 낯선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서 더 몸부림치려고 했던 것 같다. 나와의 싸움에서 반복적으로 지는 싸움이었고, 단체에서 늘 소외된 사람으로 스스로가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결과를 보게 될까봐 두려워하던 내 마음을 미리 예측해버리고 문제를 만든 것이다.
나는 정말 털털하고 단순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나 예민한 사람이었고, 밝고 긍정적인 부분이 가득한 줄 알았는데 우울하고 불안한 생각으로도 가득 찬 사람이었다.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고 잘 이해해주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가 힘들면 부정적인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하기에만 급급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난주에 내 밑바닥을 스스로가 발견한 후 계속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되기도 했다.
지금은 나 자신에 대해서 조금씩 정리가 되어가고 있는 상황이고 내 모습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사과의 인사를 전해주고 싶다. 엎질러진 물이기에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지만 그 아픔과 상처들이 고스란히 깊은 곳에 남지 않기를 바란다. 앞으로는 스스로 더욱 조심해야겠고, 친밀해지는 속도와 거리 또한 적정선을 두고 다가가야겠다. 참 고마웠던 사람들. 앞으로 다시 볼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그들의 삶을 응원하고, 또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으로 살아가야지. 그리고 나 자신을 더 알아가며 사랑해주고 존중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