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모든 경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을 경험했다. 신뢰와 편안함, 진실과 솔직함이 크게 문제가 되었던 탓이다. 물론 그 가운데 내 순간적인 감정과 잘못된 판단은 철저히 숨기고 듣기 좋은 말만 했더라면 이런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 테지만, 이미 멘탈이 저 멀리 도망가서 지쳐있던 내게 그런 판단이 설 리가 없었다. 끊임없이 부정적인 말로 속삭이던 마음의 소리가 다른 이들의 마음을 계속 불편하게 했던 것, 내가 뱉었던 말로 인해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의 입장을 충분히 생각했어야 했다.
평소 내 모습과는 전혀 달라 보였던 그때... 혼자 하는 것을 즐겨하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고, 힘들어도 절대 표현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던 내가 왜 그런 상황들을 만들어가고 다음날 눈을 뜨면 후회로 가득한 하루하루를 반복했던 걸까? '그동안 마음이 참 많이 아팠구나, 너무 지치고 괴로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구나. 그래도 혼자서 다시 해결하려고 애쓰고,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일어서야지.'라고 미리 깨달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야 그 상황들을 후회해봤자 다친 이들의 마음을 다시 회복하는 것도 어렵고 예전처럼 다시 친절하게 다가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저 진심으로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전해주고 싶을 뿐...
1. 오해와 이해의 순간
내 모습을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오해한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많은 것들을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뒤집어 보니 결국은 내가 많은 사람들을 오해하고 있었고, 그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있었다. 나 혼자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이었는데 그 사실을 일찍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가져서는 안 되는 너무 큰 욕심이었나 보다. 어디서도 만나보지 못했던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이들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었고, 이해받고 싶었고, 공감받고 싶었던 그 마음.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높은 벽을 세워가고 미리 상처를 입은 채 이해하지 못했던 시간들. 이전에 상처 받았던 다른 일들을 떠올리면서 점점 멀어지려고 했던 비겁한 내 모습. 다시 떠올려봐도 그저 아프고 안타까운 모습일 수가 없다. 그 상처를 나만 안고 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짊어지게 한 것도 그저 속상하고 아픈 일이다. 오해에서 이해로 바뀌는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어야 했는데, 그 순간을 결국 인내하지 못하고 도망치다니. 나는 그 누구보다도 나를 잘 몰랐던 것이다.
2. 소녀, 1997년 그 어딘가에서
이런 일들을 몇 번 겪어보니 자꾸만 반복해서 튀어나오는 감정들의 원인이 뭔지 궁금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21년 전인 1997년이 떠올랐다. 그 해는 참 행복하면서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픈 해였다.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때 반장을 하면서 친해진 남자인 친구에게 생전 처음으로 이성에 대한 감정이 생기려고 할 때쯤 정말 친했던 여자 친구로부터 반에서 왕따를 당했던 일이 있었다. 그 당시 어떤 소문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친구들이 나를 점점 피하기 시작했고, 내 옆에 앉으려고 하는 친구들도 없었다. 소풍을 가면 함께 사진 찍을 친구들도 없어서 60대이신 할아버지 선생님이 유일하게 사진을 함께 찍어주셨고, 밥도 늘 혼자 먹는 편이었다. 학교에서 폭력을 당하거나 말로 놀림을 받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나와 가까웠던 친구들이 순식간에 돌변해버린 그 냉랭한 태도와 침묵이 너무나 무서웠다. 이성적으로 좋아하기 시작했던 친구조차 내게 가까이하지 않는 그 모습이 더 큰 충격이었다.
학원에서는 유행했던 뽑기 아이템 중 H.O.T 반지나 머리핀 등을 아무 말 없이 웃으면서 가져가 버리는 아이들에게 돌려달라는 말도 할 수가 없었고, 부모님의 권유로 다녔던 피아노 학원, 속셈학원, 한문학원, 영어학원, 수영 학원을 다니는 게 너무나 괴로워서 하나 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친구들 모두가 좋아하는 H.O.T가 아닌, 새롭게 데뷔한 젝스키스가 눈에 들어오게 된 것과 지금까지 미친 듯이 덕후 생활을 23년째 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누군가의 시선이 두려워서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피하고 싶은 마음, 내가 좋아하기로 마음먹은 대상을 꾸준히 좋아하고 아끼고 싶은 마음.
2학기 때 전학 와서 내게 다가와준 한 친구로 인해 왕따 생활은 8개월 만에 끝나게 되었고, 그때 알게 되었던 사실도 위와 비슷했다. 1학기 때 반장을 함께 했던 이성친구가 인기가 정말 많았는데, 그 친구와 내가 친하다는 이유로 동성 친구가 질투를 한 후 헛소문을 퍼트려서 왕따를 시켰다고 했다. 어떤 소문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지만, 엄청 충격적인 내용이었기에 전학 왔던 친구가 알려주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로도 그 이성친구를 3년 동안 짝사랑하면서 편지와 장미꽃으로 마음을 전하기도 했지만 결국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너무나 아프고 시린 기억이 마음 깊은 구석에 아직까지도 자리 잡고 있었다. 여전히 내 마음은 4학년 때의 상처로 가득한 어린 소녀가 구석에 웅크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 소녀가 지금 당장 돌아가진 않겠지만, 원인을 찾았으니 앞으로는 비슷한 상황이 올지라도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며 과거로 돌아가려 하지는 말자. 소녀 역시 내가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잘 살아가길 바랄 것이다.
3. 내 모습 그대로
늘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갖고 있던 이유 중 하나가 왕따의 트라우마, 관계에 대한 불확실함이 크다고 생각했다. 낯선 곳에 가기 두렵고, 나와 정말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챙기고 싶고, 불편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드는 곳이라면 고민을 많이 하면서 자주 피하기도 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만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기에 바빴고,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나를 드러내거나 내 속마음을 들키는 것이 정말 싫었다. 친구들의 말을 항상 들어주는 친구, 마음을 잘 보여주지 않는 친구였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다 깨지면서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사람들이 너무 두렵고 무섭고 이해할 수 없었는데 결국엔 내 모습을 마주하기 두려웠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내면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제 DISC 성격 유형 클래스를 듣고 온 이후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내가 보는 나', '타인이 보는 나', '객관적인 나' 세 개의 그래프 모두 S 유형의 결과가 나왔는데 내 성격을 그대로 설명해주시는 것 같아서 놀라웠다. 내성적이고 느긋한 편이며 일보다는 사람과 사랑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생각은 많으나 밖으로 표출하지 않고 묵묵히 참는 편이다. 누군가 a와 b 중 결정하라고 한다면 엄청난 내적 갈등이 일어나고, 결국엔 다수의 결과에 따라가게 된다. 분명한 의견이 있지만 충돌하거나 다투는 것을 싫어해서 드러내지 않는다. 평화주의자이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안정적인 편이라고 한다. 그 누구보다도 인간관계에 예민해서 사람들의 표정이나 말, 행동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나는 늘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항상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자책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이런 성격조차도 타고난 것이고,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부분이라고 인정하게 되니 이제는 조금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성격도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평소에 보이지 않는 내 모습이 보일 때마다 다중인격인 건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는데 사람은 누구나 변화되는 상황이나 환경에 있을 때 행동이나 성격도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이 모습도 나이고 저 모습도 나임을 인정해주자.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가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하기 위한 것들을 찾아보며, 앞으로 함께 하게 될 사람들에게는 아픔보다는 기쁨, 상처보다는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더 많은 곳에 빛을 비추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자,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