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벌써 23일이나 됐다는 사실을 새벽에 방송을 하다가 알게 되어 너무 놀랐다. 10월에 이어 11월 역시 너무 빨리 지나가고 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별 관심이 없었고 날짜 개념 역시 없었다. 급성 후두염 때문에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느라 계속 잠에 취해 있었고, 출근할 때 며칠 연속으로 1, 2분은 지각해서 항상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점점 더 밝고 좋아지는 모습, 성장하는 나로 살아가고 싶은데 왜 이렇게 자꾸 지치고 다운되는 걸까. 좋은 일들은 왜 일어나질 않는 걸까.
1. 도망칠 수 없어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힘들다, 아프다, 속상하다, 지친다는 말을 많이 했다. 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이 터지기도 했고 내 마음도 계절이 지난 꽃처럼 시들시들 해지며 불에 타고 남은 재처럼 까맣게 타 병들어 버렸다. 회복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걸까. 판단력도 흐려지고, 혼자서 해결할 힘이 남아있질 않아서 손 내밀어준 누군가를 의지하려 하고, 몇 번씩이나 흔들리는 감정을 전부 쏟아내서 후회하는 날들을 반복하고... 이럴 때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거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기에 모든 연락을 다 끊고 싶은 그런 마음들이 불쑥 든다. 지금까지는 연락처를 종종 바꿨지만 이제는 캐스팅 디렉터, 에이전시 실장님들의 조언으로 연락처도 함부로 바꿀 수도 없다. 도망치려고 해도 이제는 자리를 지키면서 버텨야 하는 시간이 왔구나.
2. 길고도 멀지만 끊임없이 걸어야 하는 길
배우로 살아가는 것. 정말 조심스럽고 겉으로 보이는 직업이기에 뭔가 신비스럽게 감추거나 좋은 모습을 많이 비춰야 하지만, 감정에 충실하고 생각이 단순하기에 그걸 종종 잊고 산다. 어디에서나 솔직한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게 여전히 익숙하고, 오히려 나를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보는 게 더 낯설다. 친구나 가족처럼 편하면서 친근한 사람이고 싶고, 둥글둥글하게 잘 어울리고 싶은 게 사실이다.
아직 내 이름이나 얼굴을 모르는 분들도 정말 많기에 연예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부끄럽다. 영화에서는 내가 나온 장면보다 엔딩 크레딧에 내 이름이 올라가는 시간이 더 길 때도 있다. 하지만 배우로서의 존재감과 그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출연 분량이 짧고 대사가 적고 배역에 이름도 없는 배우일지라도, 스스로 작은 배우라고 주눅 들어 있지 말자. 내가 맡은 배역도 작품에 꼭 필요한 역할 중 하나이고 이 자리에 오기까지도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음을 기억하자. 앞으로는 더 많은 노력과 연기력을 쏟아내야겠지. 정신 차리자. 어떤 말에도 행동에도 휘둘리지 말고 내가 걷고자 하는 길을 꿋꿋하게 걸어 나가자.
3. 과분한 사랑, 늘 고맙습니다
길거리에서 갑자기 팬이라고 하면서 승무원으로 출연했던 드라마 <착한 마녀전> 중 한 장면을 캡처한 걸 보여주셨던 분, 주연으로 출연했던 영화 <1919 유관순> 관람 후 팬싸인회 현장에서 싸인을 받으신 후 수줍게 셀카를 찍자고 해주셨던 분, 내가 우는 장면에서 눈물이 가장 많이 났다고 말씀해주셨던 분, 영화제 참석차 행사에 참여하다가 네이버 검색 후 나를 알아보시고 싸인해달라고 종이를 건네주시며 셀카까지 찍었던 분들, 남몰래 선물을 쥐어주시는 분들, 출연한 영화 시사회에 초대할 때 자리를 빛내주시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편지와 선물까지 챙겨주신 지인분들, 촬영 현장에서 감기 걸리지 않게 손난로를 보내주신 분, 라디오 방송을 꾸준히 들어주시면서 격려의 한마디를 툭툭 던져주시는 분, 평소에는 장난을 자주 치지만 진지할 땐 힘내라고 위로를 해주시는 많은 분들...
아직 팬클럽도 없고 알려진 배우가 아니기에 이런 반응들이 여전히 낯설기도 하고 부끄러울 때가 많다. 하지만 이분들 덕분에 작품에 임할 때 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연기를 하려고 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다시금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지금은 앞이 안 보이고 막막하더라도 그 과분한 사랑을 잊지 말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보답하자. 안정적인 연기로, 좋은 작품으로, 따뜻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배우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