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이 일으킨 산업, 금융
무엇인가에 대해 알고 싶다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그것의 역사를 아는 것이다. 특히 알려고 하는 대상이 복잡할수록 역사는 더욱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 삶에서 금융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많지 않다. 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면서도 어렵고 복잡하다는 이유로 제대로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게 금융이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금융은 어렵다고 피하기에는 너무 가까이 와 있다. 우리는 적어도 금융이 무엇인지, 아주 기본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작동원리는 무엇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금융과 사기를, 금융과 우연을 구별하고 진짜 금융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금융의 역사를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은행, 증권 그리고 보험으로 분화된 오늘의 금융 산업은 17세기 영국에서 태동했다. 당시 영국은 대항해시대 초반을 주름잡던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유럽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향하며 대영제국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막강한 해상력을 갖게 된 영국은 주요 항로를 장악했고, 해상 무역을 통해 전 세계의 부가 영국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개척 활동의 중심에는 동인도회사가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식민지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고, 역사상 유례없는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동인도회사의 엄청난 성장은 사람들에게 한 가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을 저 회사에 투자하면 더 큰돈이 되어 돌아오지 않을까?’ 그들은 회사의 가치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최초의 주식회사가 만들어졌다.
물론 대영제국의 폭발적인 성장은 기업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국가 자체로서 대영제국도 빠른 속도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국가의 이름으로 더 많은 항로를 개척하고 식민지를 갖고 싶었던 대영제국은 돈이 필요했다. 물론 그들은 자신이 있었다. 돈만 조달할 수 있다면 높은 이자를 지급하더라도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 믿음을 가지고 대영제국은 높은 금리, 국가가 보증하는 높은 신용도의 국채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대영제국의 자본가들은 돈을 떼일 염려도 없고 이자도 많이 지급하는 이 채권을 놓칠 이유가 없었다. 이들이 모여 대영제국의 국채를 사들였고 그곳은 지금 영국 중앙은행이 되었다.
한편 바닷가 근처 항구, 로이즈라는 이름의 카페에서는 또 다른 금융이 시작되고 있었다. 주요 무역로를 장악한 대영제국의 상선은 항해를 무사히 마칠 때마다 막대한 부를 가져왔지만, 돌아오는 결과가 큰 만큼 돌아오지 못할 것에 대한 불안감도 커졌다. 자신의 부가 배에 달려 있었던 사람들은 그 불안감을 잠재우고 싶었고 배가 무사히 돌아왔을 때 얻을 수 있는 커다란 수익은 이 두려움을 상쇄하기 위한 비용을 일부 지불하더라도 그들에게 충분히 많았다. 이 두려움을 매개로 누군가는 배가 돌아오지 못했을 때 손실을 메워주려 했고 또 누군가는 그 손실을 막아준다면 기꺼이 돈을 지불하려 했다. 그렇게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보험이 만들어졌고, 그곳은 아직도 ‘로이즈’라는 이름으로 남아 보험 시장의 커다란 축을 이루고 있다.
성장하는 국가는 국채 시장을 만들었고, 성장하는 기업은 주식 시장을 개척했다. 그리고 성장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따라오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보험 시장을 열었다. 성장, 장롱 속의 돈이 누군가에게 전해졌을 때 더 큰 부가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은 오늘날 우리가 금융이라고 부르는 산업을 깨웠다. 그 변화는 대영제국이 시작했지만 대영제국이 저물고 난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세계화는 쉬지 않고 전 세계를 연결했고 자유로운 무역은 성장에 대한 기대를 끊임없이 키웠다. 기대감에 부푼 사람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채권, 주식 그리고 보험은 그 자체에 기대감을 거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매각되었고 그들은 파생상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선물 시장, 투자은행 그리고 재보험사가 만들어졌다. 세계화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파이는 잘게 쪼개지고, 다시 섞고,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다양한 금융을 만들어냈다. 수많은 금융 상품은 서로 다른 이름을 갖고, 다른 자산에 기초하고, 다른 구조를 갖지만 성장에 대한 기대, 파이가 더 커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영원히 커질 것만 같던 파이는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을 멈췄다. 아직도 파이가 커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파생상품을 만들어 파이 조각을 나눠먹고 있었는데 파이는 커지고 있지 않았다. 커진 것은 파이가 아니라 억지로 잡아 늘려서 만들어진 반죽 사이의 공간뿐이었다. 금융 시장에 거품이 가득 찼고, 하나가 터지자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거품이 터져버렸다. 그렇게 2008년에 글로벌 금융 위기가 찾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조심스럽게 반죽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금융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역시 대답하기란 쉽지 않다. 금융은 다양하고, 상품은 더 다양하다. 돈을 가지고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는 같아 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오늘날의 금융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돈놀이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오래전 돈놀이와 우리가 오늘날 금융이라고 부르는 것을 갈랐던 중요한 시기가 바로 17세기, 대영제국이 부풀어 오르던 때였다.
역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금융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돈이 아니라 성장이라는 사실이다. 한 번의 실패를 맛본 금융은 다시 조심스러운 출발을 했다. 하지만 주어진 상황은 녹록지 않다. 파이는 여전히 예전처럼 커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충분히 커버린 나라들은 지금 가진 덩어리를 유지하는 것도 버거운 상황이다. 금융을 깨운 조건은 희미해지고 있고, 새로운 시대는 금융에 이렇게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람이 불지 않는 바다에서 배는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