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통화를 가진 국가가 누리는 장점, 그리고 그것이 위협받는 순간
기축통화라고 하면 전 세계에서 두루 쓰이는 통화, 여러 국가의 통화 중에서 기준이 되는 통화를 말한다. 기축통화라는 게 딱 잘라서 정해지는 것은 아니라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대표적인 기축통화는 역시 달러다. 기축통화가 되려면 당연히 화폐가 가져야 하는 본질적인 성질, '교환의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어야 한다. 통화 가치가 쉽게 변하지 않고, 모든 재화나 서비스를 살 수 있어야 기축통화가 될 수 있다. 달러의 가치는 물론 변하지만 다른 통화의 가치가 더 많이 변하고 원유와 같은 대부분의 원자재는 달러가 아니면 사실상 거래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달러는 대표적인 기축통화로 불린다.
그런데 자국의 통화가 기축통화가 되면 어떤 장점이 있을까?
결론적으로 기축통화는 자국 경제에 엄청난 유연성을 가져다준다. 일단 기축통화가 되면 다른 모든 국가는 기축통화국의 화폐를 보유할 유인이 생긴다. 그래야 원자재도 살 수 있고 원자재뿐 아니라 국제 금융 거래는 대부분 기축통화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두가 달러를 충분히 쌓아두려 한다. 달러가 부족해서 일어난 외환위기를 우리는 이미 겪어봤다. 아무튼 이렇게 모든 국가가 달러를 원하다 보니 미국 입장에서는 빚을 내기가 너무나 쉽다. 채권을 발행해서 자금을 확보하고 싶은데 돈을 빌려줄 국가를 찾았을 때 모든 국가가 손을 든다. 미국의 빚, 즉 미국 채권을 가지고 있게 되면 나중에 달러로 상환받을 수 있기 때문에 달러를 보유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빚을 내기가 쉽다니 그게 장점이 맞나? 싶을 수도 있지만 갚지 못한다는 전제만 없다면 빚을 내는 건 엄청난 강점이다. 금융이라는 게 쉽게 말하면 빚내는 걸 기분 좋게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미국은 빚이 아주 많다. 전 세계적으로 빚이 아주 많은 국가에 해당하고 부채비율도 한국보다 훨씬 높다. 그럼에도 미국이 걱정하지 않는 이유는 기축통화국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미국의 채권을 원하고 있는데 빚을 내는 게 무슨 문제인가.
물론 아무리 그래도 나중에 갚아야 하는 것인데 좋다고만은 볼 수 없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물론 돈을 갚아야 되는 시점이 오면 빚은 항상 부담스럽다. 그러나 기축통화국은 여기서도 자유롭다. 그들은 기축통화를 찍어낼 수 있는 국가다. 화폐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1억 달러를 갚아야 하는데 수중에 1억 달러가 없다면 미국은 1억 달러를 찍어내서 보내주면 된다.
빚도 마음대로 낼 수 있고, 돈이 없어도 돈을 찍어서 빚을 갚으면 된다니 너무 쉬워 보이지 않나?
물론 여기에도 부작용이 있다. 금융에 한 가지 근본적인 원칙이 있다면 공짜는 없다는 것인데 돈을 찍어서 빚을 갚을 수 있다면 미국에게는 이득이다. 그런데 공짜가 없다면 누군가는 손해를 보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손해를 보고 있는 쪽은 누구일까?
바로 미국의 채권을 가지고 있었던 국가들, 미국에 돈을 빌려준 국가들이다. 미국이 돈을 갚았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돈을 새로 찍어서 보내주는 과정에서 달러의 통화량은 늘어난다. 세상의 부는 정해져 있는데 통화량만 늘어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통화 가치는 떨어진다. 그러니 그들이 빌려준 달려와 미국이 그들에게 갚은 달러는 크기는 같지만 가치는 다르다. 물론 받은 돈의 가치가 더 적다. 보통 다른 국가들은 통화 가치 하락으로 인한 손실이 있지만 그럼에도 기축통화를 보유해야 하는 이유, 그리고 채권에 붙는 이자를 생각했을 때 돈을 빌려줄 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적당한 수준에서 성립하는 말이다.
미국이 돈을 너무 많이 찍어내게 되면 생각보다 채권 가치는 더 많이 떨어지게 될 수 있다. 이제는 받게 되는 이자를 쳐도 통화가치 하락이 주는 손실이 훨씬 커서 돈을 빌려주고도 되려 손실을 보고 있는 상황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다른 국가들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손실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커지게 되면 그들은 돈을 빌려주지 않게 된다. 기존에 가지고 있는 채권도 팔고 새로 발행되는 채권을 사지도 않는다. 그러면 채권시장에 미국 국채가 엄청나게 공급되게 되고 공급 증가는 가격의 하락을 일으킨다. 국채 가격은 떨어지고, 다른 말로 하면 국채 금리는 상승하게 된다. 이제는 돈을 빌리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또 이렇게 모두가 미국 국채를 가지고 싶어 하지 않게 되면 달러도 당연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미 통화가치라 하락한 달러에 더 이상 국채 보유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없다는 사실은 달러가 가진 기축통화로서의 지위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다.
물론 미국이 엄청난 경기부양책을 통해 수많은 달러를 찍어서 공급했음에도 달러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았던 것처럼 한 번 차지한 기축통화로서의 지위가 흔들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통화가치 하락과 같은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기축통화를 보유해야만 하는 유인은 생각보다 크며, 사실상 이를 대체할만한 통화가 없기도 하다. 그럼에도 역사상 기축통화가 바뀐 사례는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미국과 미국의 달러가 주도하는 세계 질서가 만들어진 것도 역사의 시간에서 보면 아주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만큼 영원한 것은 없다. 달러를 통해 미국이 보는 이익이 어느 순간 과도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오게 되면 생각보다 그 변화는 급격하게 일어날 수도 있다.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간단히 표현하자면 기축통화의 강점은 그것을 가진 국가가 빚을 내기 아주 쉽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빚을 갚을 때도 꽤 통화를 찍어내서 갚을 수 있기 때문에 큰 강점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통화를 찍어내는 건 상대방에게 통화의 평가손실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실상 세금을 걷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그들의 평가손실을 가지고 내 빚을 갚는 것이다. 그러니 그 조세가 너무 과도하다고 모두가 느끼는 순간이 온다면 기축통화의 지위는 영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