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틈바구니 Feb 01. 2022

알고리즘에 사로잡힌 걸까

누군가의 십년의 세월이 손 안에서 재생될 때

불과 닷새만에 스크린타임 신기록을 세우고 나자 그제서야 ‘자기객관화’ 라는 오래된 습관이 발동했다. J의 치명적인 매력 때문이었다, 고 하면 간단하겠지만 스마트폰으로 영상 보기를 즐기지 않는 내가 잠을 포기하고 몇 시간째 폰을 붙잡고 있었던 상황을 설명하지는 못하므로.



사실 나의 유튜브 사용 패턴은 다소 단조로운 편이었다. 스트레칭과 묵상, 업무와 관련된 회견이나 화상 세미나 듣기, 출퇴근길에 좋아하는 노래 찾아듣기 정도로 용도가 한정돼 있었다. 구독하는 채널이 몇 개 있지만 막상 볼 시간이 없어서 유명무실했다.

지금은 유튜브 창을 열자마자 J가 나오는 클립이 나를 반긴다. J가 속한 아이돌그룹은 2008년 데뷔 이후 늘 정상을 지켜왔고, 멤버들도 십여년 동안 쉬지않고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J의 팬들이 되뇌이는 말들 ㅡ  ‘이 프로그램에도 출연했구나’, ‘우리 J 정말 열심히 했구나’ 에 공감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진다.


신기한 점은 내 기준으로는 거의 폭식(binge eating) 수준으로 많이 보았는데도 여전히 하나같이 처음 접하는 영상이라는 점이다. 개중에는 예측가능한 범위에 있는 영상(예를 들면 그룹 컴백 무대)도 많았지만, ‘아니 이런 것도 있었단 말인가!’ 싶어서 나도 모르게 재생 아이콘을 클릭하게 만드는 것들도 있었다.


마치 우연히 옷장 깊숙히 보관돼 있는 옷을 발견했는데 너무나 트렌디하고 스타일리시해서 깜짝 놀라고 말 때의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미니멀리즘은 핑계일뿐 초라하기 그지 없는 내 옷장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테고, 실제 겪었던 경험에서 우러나온 재미없는 비유를 하자면 논문을 쓰기 전 선행연구 리뷰를 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제법 많은 양의 참고문헌을 찾아 읽었는데도 자꾸만 새로운 문헌이 나오면 조금은 신이 나면서도 혹 갈피를 잡지 못할까봐 불안해지기도 했으니까.


매일 갱신되는 영상 추천 목록은 아마도 ‘유튜브 알고리즘’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불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이 알고리즘은 기존에 검색서비스나 SNS를 이용할 때면 맞닥뜨리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몇 시간 전의 검색어가 SNS에서 제품 광고로 등장하면 순간 솔깃하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나였지만, 유튜브 앞에서는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그저 J가 철저한 자기관리의 산물인 아름다운 몸을 드러내며 카리스마 넘치면서도 고운 춤선을 뽐내고 있어서,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어느 드라마에서 예쁜 여배우와 환상의 케미를 보여주고 있어서, 생활 예능에서 소탈한 웃음을 짓고 있어서… 뿐이었을까.


아니면 영상 콘텐츠의 고유한 특징에서 기인하는 힘이었을까.


확실히 모션과 사운드의 조합인 영상은 텍스트나 정지된 이미지에는 비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고, 또 진하게 잔상을 남긴다. 여전히 텍스트로 승부를 보려는 ‘사양산업’ 종사자로서 때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지만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라디오 '보기'의 세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