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숙해서 낯설었고, 그래서 반가웠다
1년이 훌쩍 지나서야 역주행 노래를 알게 될 만큼 트렌드와는 거리가 있는 생활을 하고 있지만, 사실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은 별로 없는 편이다.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재빠르게 따라가는 성격은 못 되어도, 변화 앞에서 망설이거나 주저하지는 않아왔다.
'아날로그 대 디지털'로 대비되는 기술 환경의 변화에도 의외로 일찌감치 여러 기기를 습득하면서 익숙해졌던 것 같다. 옛 감성이 더 좋다 혹은 옳다, 이런 생각을 한 기억은 거의 없었고 지금도 대체로 그렇다. 익숙하고 편안한 것이 더 좋을 때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 앞에 다가온 새로운 흐름을 어떻게 읽어낼까 또는 어떻게 하면 적응할 수 있을까, 가 관심사다. 어쩌면 이주와 전학이 잦았던 성장 배경에서부터 체화한 생존본능에 가까운 적응력(그리고 적응해야 한다는 무의식)이 이런 식으로 발휘되는 것도 같고.
여하튼 어느날 만난 J의 영상은 내 일상을 조금 바꿔놓았다. 평소라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아이돌 그룹의 직캠, 예능, 콘서트, 팬미팅, 브이로그 등 각종 동영상을 두루 보았다. 그리고 J가 최신작에서 호흡을 맞춘 여배우와 나란히 출연한 라디오 프로그램까지 '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보이는 라디오' 말이다.
오래 전부터 각 방송사가 라디오 프로그램이 진행 중인 스튜디오를 카메라로 연결해 홈페이지에서 영상으로 동시에 내보내는 서비스를 해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보이는 라디오 자체는 새로울 게 전혀 없는 셈인데, J가 담긴 어떤 영상들보다 가장 생소하게 느껴졌다. 라디오가 진행되는 동안 꼼짝없이 앉아서 '보는' 경험이 처음이어서일까.
영상의 위세는 이미 1990년대에도 높았지만, 그래도 그 시절 학창시절을 보낸 청소년들은 여전히 라디오를 많이 들었다. 심야 시간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테이프에 녹음해 친구들과 서로 교환하기도 했고, 애청하는 프로그램에 사연을 적은 엽서를 보내기도 했다.
당시 내가 좋아하던 뮤지션들이 심야 프로그램 DJ를 하고 있거나 고정 게스트로 출연한 덕에 나 역시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원래도 친분이 있는 이들이 서로 기탄없이 나누는 담소를 들으면서 사춘기 감성을 더욱 예민하게 벼릴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질풍노도를 견뎌내는 힘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나 말은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했다. 그들이 이야기 나누는 현장을 머릿속에서 괜히 그려보면서 혼자 흐뭇해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서 나도 어른, 정확히 말하면 대학생이 되어 그들이 말하는 세계-자유와 음주, 창작과 연애 따위-에 입문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때만큼은 아니지만 그 이후에도 운전할 때, 작업할 때 종종 라디오를 들었다. 하지만 육아휴직 기간 배경음악처럼 틀어놓았던 클래식FM을 제외하고는 라디오 프로그램 하나를 통째로 집중해서 들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J가 여배우와 함께 처음에는 게스트로, 나중에는 DJ로 출연한 보이는 라디오를 보고 만 것이다. (그 이후 J가 단독으로, 또 멤버들과 출연한 다른 라디오 프로그램 두어개도 보았다)
보이는 라디오를 접하고 처음 든 생각은 과연 라디오가 맞나, 였다. 카메라는 마스크를 착용한 두 배우를 시종일관 비추고 있었다. 광고와 음악이 나올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말보다는 작은 손동작, 눈웃음, 어깨 들썩임 등을 주시하는 나를 발견했다. 언어 정보보다 영상 정보를 더 갈구하고 있었다.
사실 J의 영상을 보는 재미 중 하나는 댓글에서 나오는데, 보이는 라디오에 대한 반응이 궁금해서 댓글창을 확인했다. 마치 내 심경을 대변하듯이 '기어이 이것까지 보고 있을 줄 몰랐어요'라는 댓글이 많이 보였다. 그런데 '오늘도 보러 왔어요' '매일같이 들어요'라는 댓글을 보고는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라디오를 매일 '재생'한다는 것은, 라디오라는 매체가 본디 갖고 있는 속성을 뛰어넘는 것이 아닌가.
어린 시절 라디오가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은 특정한 시간,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불특정 다수와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단 하나 뿐인 시간, 어쩌면 순간일 지도 모르기에 라디오에 귀 기울이는 때가 더욱 가치있게 느껴졌다. 까딱하면 방금 라디오에서 나온 곡의 이름을 놓쳐버릴수도 있다는 것, 그러면 무척 아쉽다는 것, 그래서 노래 직전이나 직후 DJ의 멘트에 집중하면 좋다는 것, 하지만 설령 놓쳤어도 큰 일이 일어나지는 않고 별탈없이 생활할 수 있다는 것, 등을 깨달아 갔다. 물론 그 때도 나중에 다시 찾아듣고 싶은 마음에 라디오 방송을 테이프로 녹음했지만, 막상 다시 들은 적은 많지 않았다.
보이는 라디오는 내가 본질이라고 여겼던 라디오의 속성과는 사뭇 다른 세계를 보여줬다. 라디오가 먼저 진화한 것인지, 이용자들이 먼저 요구한 것인지를 알 수 없다. 다만 친숙한 매체의 변화가 조금은 낯설었고, 동시에 반갑기도 했다. 라디오가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이들에게 여전히 사랑받고 있구나, 싶어서.
또 한참 동안 보이는 라디오를 보고 있다보니 이상한 표현일지는 모르지만 '정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J가 마스크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으니 J의 미모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는 점을 말해둔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온갖 예능 프로그램마다 남발되는 자막이 없어서였던 것 같다. 친절하다 못해 무례하고 불쾌한 자막이 제거된 채로 J의 말과 표정, 몸짓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청정 예능'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