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마샬, <장벽의 시대>(Divided)
지구화 또는 세계화(globalization) 담론이 한창 유행하던 때 - 아마도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일 것 같은데- '세계는 평평하다'는 분석과 이에 대한 반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둘다 설득력이 있었다.
지금은 세계화 담론도, 세계화의 폐해라는 말조차 진부해졌다. 우리는 인간의 노동, 인간과 기술의 관계, 나아가 호모 사피엔스 정체성 자체까지도 바꾸고 있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세계화의 정의라고 할 '사람과 물자 등의 자유로운 이동'이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 지금, 갈수록 뚜렷해지는 현상이 있다. 국경을 넘는 이동이 늘어날수록, 그 이동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도 덩달아 커지고 있으며(물론 통제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고), 결국 가장 손쉽고도 강력하게 쓰이는 수단은 '장벽 세우기'라는 것이다.
이 책은 세계 곳곳에서 물리적, 기술적 장벽들이 어떻게 새로 등장했는지, 또 더욱 공고해지고 있는지, 그 장벽들이 인류의 삶과 가치에 어떤 파급력을 가져오고 있는지를 다룬다. 저자 Tim Marshall은 <지리의 힘>으로 널리 알려진 국제문제(?) 저술가인데, 제법 심오한 주제를 대중교양서 수준에서 속도감있게 그려낸다.
저자는 현대 중국 권력의 디지털 통제를 고대 중국의 만리장성과 대비시키는가 하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중동, 아프리카 에서는 일그러진 구획(국경)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분쟁을 야기하는 현실을 짚어내는 남다른 솜씨를 보여준다. 인도와 국경을 맞댄 방글라데시의 관계, 또 인도가 내부적으로 안고 있는 빈곤과 차별, 기후변화 등의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을 '장벽'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내는 대목도 흥미롭다.
(21세기의 인도는) 실제로 활기차고 고도 기술산업의 영역을 포용하는 점점 더 중요한 나라이다. 그러나 그 내부에는 수천만 시민들의 전진을 가로막는 수백만의 장애물이 있다. 인도를 둘러싼 장벽은 사람들을 차단하기 위해 고안되었지만,
인도 내부의 장벽은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장벽은 부분적이고 일방적인 임시방편의 ‘해결책’으로 세워질 수 있고 세워질 것이지만, 번영 또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이 패배하게 될 것이다. (p207)
개인적으로는 미국에 관한 챕터를 재밌게 읽었는데, 특히 중남미 이주민의 미국행을 막기 위해 트럼프가 고안한 미국-멕시고 장벽 건설에 대한 찬반 논쟁을 '미국적'이라는 개념과 연결짓는 부분이 와닿았다. 트럼프의 장벽을 반대하는 이도 지지하는 이도, 미국이 추구하는 본래 가치와 이념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설명하는 상황을 지적하고 있다.
장벽 지지자들에게 장벽이 매우 중요한 까닭은, 미국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타자성’ 때문이며, 몇몇이 ‘미국적’ 문화라고 여기는 것을 그들이 약화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장벽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장벽은 자유 해방 평등이라는 미국의 가치에, 그리고 미국 그 자체에 대립된다. 장벽을 둘러싼 논쟁은 다가올 세기에 ‘미국적’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누가 그것을 규정하는가에 관한 논쟁의 핵심으로 다가온다.(p65)
사실 미국을 다루는 2장(1장은 중국)을 읽으면서는 잠시 옛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이주(migration)'라는 주제에 꽃혀서, 또 국경을 넘는 사람들에 대해 더 이해하겠단 작은 포부로 미국으로의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었기 때문이다. 진학해서도 나름대로 성실하게 분투했다. 열정이 충만했고, 생각도 많이 했고, 많은 일을 실행에 옮겼다.
그런데 지금은 당시의 고민이 첫사랑처럼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조금은 씁쓸하지만, 여기서 그만 멈추기로 한다. 결과와 상관없이 후회하지 않아도 될 만큼 최선을 다했던 시간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