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제재 외교>, 스기타 히로키 저
북한 핵 문제가 국제 사회 현안으로 대두한 지난 약 30년을 관찰하자면, 일련의 구조나 흐름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단순화하면 '북한의 도발->긴장 고조->국제사회의 제재와 압박->대화->협상 결렬'로 이어지는 패턴인데, 물론 반드시 선형적(linear)이지도 않고 때로는 각각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대목은 북한에 대한 각종 제재(sanction)가 진화해온 과정이다. 북한의 핵능력이 고도화되는 것에 비례해, 대북 제재 레짐도 전문화, 고도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대북 제재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제재의 '기술', 또 국제법과 국내법과 금융시스템을 아우르는 복잡한 제재의 '아키텍처'(영어를 쓰고 싶지 않지만 달리 적절한 한국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차원을 보면 제재의 발전 속도는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속도를 능가하고도 남는다는 생각도 든다.
'피 흘리지 않는 전쟁, 그 위력과 어두운 이면'이 부제인 책 <미국의 제재 외교>에도 대북제재에 관한 언급이 몇 군데 나온다. 2005년 북핵 6자회담 9.19 공동성명 탄생 직후 불거진 'BDA 사태'를 다루는 챕터의 한 대목이다.
금융제재라는 수단으로 북한의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중국, 한국, 일본을 중심으로 국제 사회가 협조하여 북한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으로, 제재의 해제를 향한 구체적이며 북한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제안을 행하는 외교가 필요하다. 그 역할은 미국 외에 다른 국가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 정부 내에서 엇박자가 나면서 그 기회를 잡지 못했다. (p95)
미국 재무부가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이 북한 불법자금 세탁에 활용되고 있다는 주의보를 내린 이후, BDA는 북한 계좌의 자금을 모두 동결해버렸고, 전 세계 금융기관들도 북한과의 거래를 모두 끊어버렸다. 금융 시스템 접근이 끊긴 북한은 크게 반발했고, 6자회담은 1년 넘게 중단됐고, 북한은 1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그런데 재무부의 조치에 대해 6자회담을 담당하던 국무부는 사전에 충분히 알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위대목에 나오는 '미국 정부 내 엇박자'도 이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BDA에 대한 재무부의 대응은 금융시장 질서를 지키는 차원에서 이뤄진 법적 행정적 조치였겠지만, 저자의 말대로 외교와 보조를 맞추지 못하면서 목표 달성을 지연시켰다.
책은 버락 오바마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를 거치면서 미국의 제재가 더욱 강해졌다고 지적하며, 전쟁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미국이 제재를 남발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물음을 던진다. 특히 트럼프는 2017년 1000건, 2018년 1500건씩 제재를 신설했는데, 오바마 집권 시기에 연간 300~600건의 제재가 단행된 것과 비교해도 폭발적인 증가를 보여준다.
트럼프가 제재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상대국을 굴복시키고 자신이 바라는 딜을 쟁취하기 위해, 제재를 거래 재료로 사용한다"고 일갈한 저자는 트럼프의 대북 외교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혹독한 평가를 내린다. 대북제재의 목표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CVID)'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를 충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북한의 단거리 미사일 실험을 허용하고 김정은 위원장과 친밀하게 회담을 거듭했던 트럼프의 행동으로부터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개발 및 핵탄두의 소형화를 저지할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하는 그의 속내가 전해져 온다. 제재의 목적이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북한을 비핵화의 방향으로 유도할 수 없다.(p214)
일본 교도통신 기자로, 구소련, 중동, 뉴욕, 워싱턴 특파원을 지낸 저자의 관심은 사실 북한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책의 초점은 달러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의 금융제재가 왜 강력한지,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는 미국 금융제재는 과연 합리적이고 타당한지, 제재로 인한 의도하지 않은 결과(피해를 포함해)는 무엇인지 등을 중동,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등 다양한 지역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데 있다.
원래도 책에 담긴 대북제재 관련 내용을 위주로 이 글을 정리할 생각은 없었는데, 첫 문장을 북핵으로 시작하다보니 이렇게 되고 말았다. 기록 차원에서, 또 책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다른 부분도 몇 가지 남겨보겠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통해 테러조직에 대한 자금 제공을 금지했는데, 각국이 금융제재의 대상을 정할 수 있도록 했고, 이는 미국의 독자 제재가 유엔 안보리 결의 차원이라고 말하는 근거가 됐다.
제재를 우려하는 은행들이 위험회피(de-risking) 전략을 구사하면서 해외 이주자들- 주로 개발도상국이나 저개발국 출신-이 본국에 송금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저자는 미국 제재의 '국외 적용' 현상이 확대되는 현상을 1) 달러 경제가 지닌 위력 2) 테러방지나 대량살상무기 금지라는 목적이 부여하는 제재의 '정당성' 3)사법적 조치는 '삼권분립' 원칙에 따라 협상으로 풀기가 어렵고 4)미국이 제재 부과 이유를 국제사회의 보편적 규범 수호를 위해서라고 설명하면, '주권 침해'에 해당한다는 국제법 논리로 대응하기가 힘들다, 는 것으로 분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