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의 대화>, 히가시 다이사쿠 저
서로를 상대로 전쟁을 지휘했던 핵심 정책 결정자들이 20여년만에 마주앉아 얼굴을 맞댄다.
드라마같은 일이 실제로 베트남 하노이에서 일어났다. 1997년 6월, 베트남전 당시 미국의 국방장관이던 로버트 맥나마라와 베트남의 외무차관이던 응우옌꼬탁을 비롯해 양측 관료와 전문가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은 것이다. 훗날 '하노이 대화'로 불리게 된 이 현장에서 양측은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전쟁 기간 몇 가지 결정적인 국면 - 평화협상이 왜 실패했는지 등- 들을 돌아본다.
<적과의 대화>는 일본 출신 국제분쟁 연구가인 저자가 NHK 방송 디렉터 시절 제작한 다큐멘터리에 기초하고 있다. 하노이 대화 관련 각종 기록을 입수한 것은 물론, 맥나마라를 비롯해 미국과 베트남의 대화 참여자들을 별도로 찾아가 인터뷰하고 설득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책 앞부분에는 저자의 끈기와 돌파력이 겸손하게 적혀 있는데, '저널리스트틱'하다는 말을 재정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책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는 단어, 그리고 책장을 덮고도 여운을 남기는 단어를 꼽자면 '놓쳐버린 기회(missed opportunity)'다. 맥나마라가 하노이 대화를 처음 제안하면서 내걸었던 대화의 '명칭'이기도 했다.
냉전 시기 한국전쟁과 더불어 가장 처참했던 '열전'인 베트남전쟁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전쟁을 피할 기회는 없었는지 또 전쟁을 하루라도 일찍 끝낼 방법은 없었는지, 를 필연적으로 질문해야 했을 것이다.
나흘간 진행된 하노이 대화의 주제도 이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정녕 전쟁이 불가피했던 것인지, 1965년 2월 미국의 북베트남 공습으로 본격 시작된 전쟁의 결정적 원인은 무엇이었는지, 65~68년 사이 미국이 제안한 비밀 평화 협상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지 등이다. 이 과정에서 양측은 당시의 판단과 결정을 변호하며 공방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화의 끝에 도달한 결론은, 결국 베트남과 미국 모두 상대에 대한 무지와 오해로 인해 심각한 오판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쟁의 와중에도 소통을 지속해야 한다'는 교훈에 도달한다. 맥나마라는 특히 최고지도자들이 대화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쟁을 막기 위한 소통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사실 상투적인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베트남전을 구성한 몇 개의 중요한 고비를 돌아볼 때마다 '대화 중이었더라면' 하는 진한 아쉬움과 후회가 남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과 베트남은 애당초 서로의 목표나 정세에 대한 판단부터 틀렸다. 미국은 북베트남이 중국, 소련과 공조해 지역 내 공산화를 최종 목표로 삼고 있다고 봤고, 베트남은 미국이 남베트남의 정부를 지원해 통일을 방해하고 있다고 여겼다. 이후 북베트남의 미군에 대한 기습 게릴라 공격, 평화협상을 제안하고도 계속된 미군의 폭격과 공습 등은 양측의 간극을 더욱 넓히고 말았다.
책의 큰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개인적으로 기억해 두고 싶은 대목이 몇 개 있었다. 하나는 미 국무부 동남아 전문가로 비밀 평화 협상 실무를 책임졌던 체스터 쿠퍼가 하노이 대화에 참여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인데, 학자적 호기심과 역사적 부채의식을 안고 고민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 여실히 느껴졌다.
잊어버리려고 해도 잊히지가 않는 겁니다. 그리고 무수한 의문이 내 마음 속에 남아 있어요. 왜 평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이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했는가? 그때 하노이 정부(북베트남 정부)는 우리의 메시지를 어떻게 이해했고, 왜 협상을 거절했는가? 그 이유를 알아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노이에 와서) 한 가지 크게 충격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리에 40대 후반에서 50대 전반의 남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30년 전에 우리와의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던 겁니다. (p67)
둘째는 당시 고령의 나이로 하노이 대화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저자가 따로 찾아간 보응우옌잡 전 부총리다. 전쟁 당시 북베트남 최고사령관이었다. 미국과의 수교를 통해 경제 개혁을 이뤄내고, 중국으로부터의 위협을 제어하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베트남의 '실용 외교', 동시에 미국에 맞서 전쟁을 치르고 승리한 유일한 나라라는 '자부심'이 엿보이는 대목인 것 같다.
과거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장래를 응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국교 정상화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관계의 정상화는 단지 외교 분야만이 아니라, 폭넓은 분야에서 전개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승자고 누가 패자였나요? 물론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베트남 인민의 승리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했던 많은 미국인의 승리이기도 합니다. (p207)
이 책이 한국에 번역된 때는 2018년이었는데, 연이은 남북, 북미정상회담으로 한반도 '화해' 무드가 무르익는 듯했던 흐름을 타고 잔잔히 회자됐다. 2019년 2차 북미 정상회담장이 하노이 대화의 무대였던 메트로폴 호텔로 결정되면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실은 나 역시 그 시점에 이 책을 사두었다가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그런데 남북미 대화보다도 한일관계의 장면과 겹쳐진다는 인상을 더 강하게 받았다. 아마도 지금은 물러난 고위 관료가, 한일 갈등에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와 지소미아 종료 문제로 최고조에 이르던 시점에 이 책을 언급한 것을 기억하고 있어서이겠지만. 책을 덮고 나니,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눌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공식적인 장에서 보여지는 말과 글이 늘 명료하고 깊이가 있었던 그 분의 근황이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