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드롬 소믈리에 Ep.5]
9시 수업은 '배신'입니다.
부제: 대학생이 되면 늦잠 잘 줄 알았던, 상처받은 20살에게
(딸랑-. 문이 열리고 20대 초반의 여성 손님이 들어온다.
그녀는 모자를 푹 눌러썼고, 한 손에는 생명수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꽉 쥐고 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혹은 세상 모든 알람 시계를 부수고 싶은 표정이다.)
(따뜻한 물수건을 건네며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서 오세요. 우리 어린 손님, 눈 밑이 퀭하군요.
단순히 잠을 못 자서가 아니라, 믿었던 세상에 배신당해서 억울해하는 눈빛입니다.
여기 앉아서 그 억울한 마음을 좀 내려놓으세요.
#1. 손님의 증상
"소믈리에님, 저 진짜 학교 가기 싫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1교시'가 죽도록 싫어요.
어른들이 그랬잖아요. 대학 가면 살 빠진다, 대학 가면 연애한다, 그리고 대학 가면 네 마음대로 시간표 짜고 늦잠 잘 수 있다고요!
저는 그 말만 믿고 고3 때 코피 쏟아가며 공부했어요.
아침 7시 등교? 야간 자율 학습? '대학만 가면 끝이다' 하면서 버텼다고요.
그런데 이게 뭐예요? 수강 신청 망해서 전공 필수 과목이 월요일 아침 9시라뇨?
지옥철 타고 1교시 수업 들어가면, 고등학교 교실이랑 똑같아요.
교수님은 출석 부르고, 애들은 엎어져 자고.
저는 겨우 대학생이 됐는데, 왜 아직도 고등학생처럼 살아야 하죠?
이럴 거면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나 현타가 와요. 저 그냥 자퇴하고 싶어요.“
#2. 소믈리에의 진단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꽉 쥔 커피잔을 안쓰럽게 바라본다.)
아이고, 가여워라. 이건 게으름이 아닙니다.
손님은 지금 잠이 부족한 게 아니라 '자유'가 부족한 겁니다.
당신의 진단명은 [입시 해방감 박탈에 의한 시차 부적응 쇼크]
(Freedom Deprivation Shock & Time Lag Stress)입니다.
손님에게 '오전 9시'는 그냥 시간이 아닙니다. 트라우마입니다.
지난 12년, 초중고 내내 강제로 눈을 떠야 했던 '구속의 시간'이죠.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그 시간의 주인이 '나'일 줄 알았는데, 수강 신청 실패라는 시스템이 다시 그 시간을 뺏어가 버린 겁니다.
마치 감옥에서 출소했는데, 교도관이 "미안, 서류 착오니까 일주일만 더 있다 가"라고 하는 것과 같은 절망감이죠.
몸은 20살 대학생인데, 생활 패턴은 고3으로 강제 회귀 당했으니 뇌가 파업을 일으키는 건 당연합니다.
#3. 테이스팅 노트
이 증후군의 맛은, 김빠진 사이다처럼 밍밍하고 답답합니다.
세상이 약속했던 톡 쏘는 해방감이 없으니까요.
손님, 당신이 1교시를 혐오하는 건, 수업 내용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시간'에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하는 겁니다.
"나는 이제 성인인데! 내 스케줄은 내가 정해야 하는데!"라는 자아는 비대해졌는데, 현실은 여전히 출석부의 노예니까요.
이건 '보상 심리'의 좌절입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올 줄 알았는데, 고생 끝에 또 다른 고생(1교시)이 와버렸으니….
그 배신감에 몸부림치는 당신은 지극히 정상이고, 또 안쓰럽습니다.
#4. 오늘의 처방
상처받은 당신의 자유 의지를 위한, 달콤하고 소소한 처방입니다.
1교시 가는 날은, 고등학생 때는 절대 못 입을 옷을 입으십시오.
찢어진 청바지, 화려한 액세서리, 혹은 과감한 화장.
거울을 볼 때마다 "난 고딩이 아니야. 난 자유로운 영혼이야"라고 시각적으로 뇌를 속이십시오.
학교 가는 길에 편의점 커피 말고, 제일 비싼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휘핑 잔뜩 올라간 음료를 사드십시오.
학생 때는 용돈 아끼느라 못 했던 '돈지랄'을 아침부터 시전함으로써, 스스로 "난 경제권을 가진 어른이다"라는 효능감을 선물하는 겁니다.
교수님 말씀을 듣되, 필기는 아이패드로 하든 노트북으로 하든 가장 '대학생다운' 도구를 쓰십시오. 그리고 가끔은 강의실 창밖을 보며 멍때리는 사치를 누리십시오.
고등학교 땐 딴짓하면 혼났지만, 지금은 아무도 안 혼내잖아요? 그게 대학생의 특권입니다.
너무 억울해 마세요.
결국 이 1교시도 당신이 졸업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과정의 일부라는 걸 깨닫는 순간, 당신은 진짜 어른이 될 겁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억울해하며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