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드롬 소믈리에 Ep. 12]
당신은 '천사'가 아니라 '자동문'입니다.
부제: 미움받을 용기가 없어 야근으로 평화를 사는 30대 '예스맨'에게
(딸랑-. 문이 열리고 30대 중반의 남성 손님이 들어온다. 인상이 참 서글서글하고 좋아 보이지만, 넥타이는 비뚤어져 있고 어깨에는 피로가 곰 두 마리쯤 얹혀있는 듯하다. 자리에 앉자마자 휴대전화 진동이 울리자 조건반사적으로 "아, 네네! 가능합니다!"라고 받는다.)
어서 오십시오. 아주 인상이 좋고 싹싹한 분이 오셨군요. 방금 전화를 받으실 때 표정은 울상인데 목소리는 명랑한 걸 보니, 영혼과 성대가 분리된 지 꽤 오래된 분 같습니다.
#1. 손님의 증상
"소믈리에님, 제 입에는 자아가 없는 게 분명합니다. 방금 그 전화도 김 과장님이거든요. 내일 오전까지 보고서 좀 대신 써 달래요. 제 머릿속에서는 분명히 '미친 거 아냐? 나도 내 일 산더미인데!'라고 욕을 했거든요? 그런데 제 입이 제멋대로 이러는 거예요. '아, 네! 과장님 급하시죠? 제가 해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그 짧은 1초의 정적을 못 견디겠어요. 제가 거절하면 상대방 표정이 굳어지거나, 분위기가 싸해지는 그 순간이 죽기보다 싫어요. 상대가 실망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제가 오늘 밤새우고 몸이 부서지는 게 마음 편해요.
사람들은 저보고 '법 없이도 살 사람', '진국'이라고 칭찬하죠. 그런데 정작 저는 속이 문드러져요. 여자친구가 주말에 쉬자고 해도 거절 못 해서 약속 잡고, 그러다 피곤해서 싸우고. 저, 사실 착한 게 아니라 그냥 비겁한 놈 아닐까요? “
#2. 소믈리에의 진단
(손님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제스처를 취하는 것을 안쓰럽게 본다.)
손님, 당신은 비겁한 게 아닙니다. 평화를 너무 사랑해서 '자기희생'을 화폐로 쓰고 있을 뿐이죠. 당신의 진단명은 [거절 공포에 기인한 반사적 긍정 중독] (Reflexive Positivity Addiction by Rejection Phobia)입니다.
당신의 'YES'는 동의의 표현이 아닙니다. 방어 기제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내가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 부정적인 감정을 마주하기 싫어서, 뇌를 거치지 않고 척수 반사로 "네"를 뱉어버리는 겁니다.
마치 비밀번호 없는 '자동문' 같습니다. 누구든 앞에 서기만 하면 웰컴이라며 열려버리니, 사람들은 당신을 '좋은 문'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만만한 문'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3. 테이스팅 노트
이 증후군의 맛은, 설탕 코팅된 독약 같습니다. 처음엔 달콤하죠. 모두가 당신을 좋아하고 칭찬하니까요. 하지만 결국엔 당신의 속을 다 갉아먹습니다.
냉정하게 말해볼까요? 당신이 김 과장의 일을 대신해 준다고 해서 김 과장이 당신을 존중할까요? 아닙니다. 그냥 '가성비 좋은 호구'라고 생각할 겁니다. 당신은 '관계'를 지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당신의 소중한 시간과 자존감을 헐값에 팔아넘긴 겁니다.
거절은 상대방을 공격하는 게 아닙니다. "내 시간은 당신의 시간만큼 소중합니다"라고 알려주는 친절한 경고판입니다. 이 경고판이 없는 땅은 누구나 와서 쓰레기를 버리는 공터가 되어버리죠. 지금 당신 마음처럼요.
#4. 오늘의 처방
고장 난 자동문을 수리하고, 단단한 수동문이 되기 위한 처방입니다.
부탁받는 즉시 대답하지 마십시오. 무조건 이렇게 말하는 훈련을 하십시오. "제가 지금 하던 일이 있어서요. 스케줄 확인해 보고 10분 뒤에 말씀드릴게요." 이 10분은 당신의 뇌가 'YES'라는 습관성 발작을 멈추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골든타임입니다.
큰 부탁은 어려우니, 작은 것부터 거절하십시오. 점심 메뉴 뭐 먹을래? 하면 "아무거나요" 하지 말고 "전 짜장면 싫어요"라고 말씀하십시오. 회식 2차 가자고 하면 "저는 피곤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라고 지르십시오. 해보면 알게 됩니다. 당신이 거절해도 지구는 멸망하지 않고,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걸요.
남에게 'NO'라고 말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 'YES'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김 과장의 부탁을 거절하는 건, "나는 오늘 내 저녁 시간을 지키겠다."라는 나에 대한 긍정입니다. 이제 남의 비위를 맞추는 '예스맨'은 사표 내고, 내 인생의 '보디가드'로 재취업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