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드롬 소믈리에

[신드롬 소믈리에 Ep. 18]

by 린나이

당신은 '시크'한 게 아닙니다. '숨고 싶은' 겁니다.

부제: 옷장에 검은색, 네이비색 옷만 50벌 걸려있는 '인간 그림자'에게


(딸랑-. 문이 열리자마자 어두컴컴한 그림자 하나가 스르륵 들어온다. 검은 모자, 검은 마스크, 검은 롱패딩, 검은 바지, 검은 신발. 마치 명탐정 코난에 나오는 '검은 조직'이나 닌자가 잠입한 듯한 비주얼이다.)


어서 오십시오. 아주 묵직하고 어두운 기운을 몰고 오셨군요. 장례식장에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아니면 오늘 밤 비밀 작전이라도 수행하러 가십니까? 아, 그냥 친구 만나러 오신 복장이라고요? 실례했습니다.


#1. 손님의 증상


"소믈리에님, 제 옷장을 누가 보면 먹물을 쏟은 줄 알 거예요. 저는 블랙, 네이비, 차콜 그레이. 딱 이 세 가지 색 아니면 불안해서 못 입겠어요. 지난봄에 큰맘 먹고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샀거든요? 그런데 거울 앞에 서니까 제가 무슨 발가벗은 기분이 드는 거예요. 너무 화사해서 사람들이 다 저만 쳐다볼 것 같고, 김칫 국물이라도 튀면 인생 망할 것 같고. 결국 환불하고 다시 검은색 코트 사 왔어요.

친구들은 저보고 '저승사자 룩'이니 '잡스 병'이니 놀리는데, 저는 이게 마음 편해요. 일단 날씬해 보이고, 대충 입어도 중간은 가잖아요. 아침마다 색깔 매치하느라 고민할 필요도 없고요. 저는 그냥 '시크'하고 '미니멀'한 걸 좋아하는 것뿐인데, 왜 다들 저보고 우울해 보인다고 할까요? 제가 색채 감각이 죽어버린 걸까요? “


#2. 소믈리에의 진단


(손님의 검은 패딩 위에 내려앉은 하얀 먼지 하나를 톡 털어주며 미소 짓는다.)


손님, 당신은 시크한 게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세상으로부터 '보호색'을 입고 있는 겁니다. 당신의 진단명은 [자기 방어적 무채색 위장술 증후군] (Self-Defensive Achromatic Camouflage Syndrome)입니다.

동물들은 천적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주변 환경과 비슷한 보호색을 띠죠. 당신에게 '검은색'은 도시라는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적의 위장술입니다. 튀지 않아야 공격받지 않고, 무난해야 평가받지 않으니까요.

당신이 베이지색코트를 입고 발가벗은 기분이 든 건, 그 옷이 당신의 '존재감'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주목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나를 보지 마세요. 나는 그냥 지나가는 배경입니다'라고 외치고 싶어서, 자체를 그림자로 만들고 있는 겁니다.


#3. 테이스팅 노트


이 증후군의 맛은, 99% 카카오 초콜릿 같습니다. 남들은 "고급스러운 쌉싸름함"이라고 포장하지만, 사실은 그냥 쓰고 텁텁할 뿐이죠.

검은 옷의 가장 큰 함정이 뭔지 아십니까? '나는 안전하다'라는 착각을 준다는 겁니다. 하지만 계속 어둠 속에 숨어 있다 보면, 당신의 표정도, 기분도 같이 어두워집니다. 옷은 제2의 피부입니다. 매일 상복 같은 옷만 입으면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칙칙할까?"라고 한탄하는 건 모순 아닐까요? 당신이 색을 거부하는 동안, 당신의 인생 팔레트도 점점 흑백 영화처럼 변해가고 있습니다.


#4. 오늘의 처방


당신의 흑백 인생에 채도를 1%씩 높이는 그러데이션 처방입니다.


당장 노란색 패딩을 입으라는 게 아닙니다. 그건 당신에게 고문이죠. 아주 작은 곳, 남들 눈에 잘 안 띄는 '양말'부터 시작하십시오. 검은 바지 밑단 아래로 살짝 보이는 초록색, 빨간색 양말. 나만 아는 그 작은 일탈이 당신에게 "나도 색깔 있는 사람이야"라는 묘한 자신감을 심어줄 겁니다.


"나 네이비도 입어!"라고 항변하지 마십시오. 당신 눈엔 검은색이나 네이비나 거기서 거기입니다. 딱 한 톤만 밝혀봅시다. '파란색' 셔츠나 '카멜색' 머플러. 무채색과 가장 잘 어울리면서도, 당신의 얼굴에 혈색을 돌게 해 줄 안전한 색들입니다.


검은 옷이 관리가 쉽다고요? 천만의 말씀. 검은 옷은 세상의 모든 먼지, 비듬, 고양이 털을 자석처럼 끌어당겨서 "나 여기 있어요!" 하고 광고합니다. "아, 먼지 떼기 귀찮아서 밝은 옷 입었어." 이 핑계라면 당신의 시크함을 유지하면서도 밝은 옷을 입을 명분이 생길 겁니다.


이제 그림자놀이는 그만하고, 빛 속으로 걸어 나오시죠. 당신은 배경이 아니라 주인공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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