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한의학 서고에서 만화책을 빌리는 수작
그가 일하는 공간에는 늘 서늘하고도 묵직한 냄새가 났다. 마른 뿌리와 잎사귀들이 지닌 고유의 냄새, 이를테면 당귀나 감초 같은 한약재들이 공기 중에 은은하게 섞여 있는 듯했다. 양갈비 집에서의 유쾌했던 식사 이후, 나는 인터뷰 내용의 추가 확인이라는 명목으로 그의 진료실을 찾았다.
한쪽 벽면을 천장까지 가득 채운 책장은 그의 머릿속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제목조차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두꺼운 한의학 전공 서적들, 누렇게 바랜 동의보감 번역본들이 숨 막힐 듯 정갈하게 꽂혀 있었다.
'참 재미없게도 산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책장을 훑어내리던 참이었다. 시선이 가장 아래쪽 구석진 칸에 머물렀다. 무겁고 진지한 활자들의 숲 속에서 유독 이질적인 색채를 뿜어내는 것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낡은 소년 만화책 시리즈였다.
"만화책도 봅니까?"
차를 내오던 그가 찰나지만 멈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묘한 당황스러움이었다.
"아, 네. 어릴 때부터 모았던 거라 버리기가 좀 그래서요. 머리 식힐 때 가끔 봅니다."
그의 빈틈을 발견한 순간, 내 안의 연애 세포가 본능적으로 생존의 촉각을 곤두세웠다. '물건 빌리기'는 다음 만남을 약속하는 가장 고전적인 수작이니까. 나는 평소 만화책을 들춰보지도 않는 활자 중독자였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거, 저 좀 빌려주면 안 돼요? 요즘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이런 게 필요했거든요."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갱년기 열감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것과 소년 만화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지만 나는 기어코 그 무거운 만화책 열 권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다 읽으면 돌려주러 와야 하니까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진짜 목적이 가방 속에서 묵직하게 존재감을 과시했다. 갱년기라는 낯선 계절을 건너는 중인 내가, 이 서늘한 연하 남자를 다시 보기 위해 중학생이나 쓸 법한 수법을 쓰고 있었다.
어느 봄날 음침한 담 밑에서 기어코 돋아나고야 마는 작은 풀잎새처럼, 이 뻔한 수작 끝에 피어날 감정이 무엇인지 나는 이미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모르는 척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