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피디아

<나의 눈부신 친구>: 수박 한 통, 바나나 한 송이, 그리고 너

by 린나이


"우리는 서로의 빛이자, 가장 짙은 그림자였다."


엘레나 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를 읽는 내내, 나는 나폴리의 먼지 낀 골목이 아니라 나의 중학교 복도를 걷고 있었다. 누군가 건드리면 톡 하고 터질 것 같은 예민함,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갈망, 그리고 죽도록 미우면서도 죽도록 사랑했던 내 친구들의 얼굴이 페이지마다 겹쳐 보였다.




1. 안으면 부서질 것 같았던 우리




소설 속 레누(엘레나)와 릴라의 우정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것은 전쟁에 가깝다. 서로의 명석함을 질투하고, 서로의 불행에 안도하다가도, 결국 서로가 없으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관계. 그 시절의 나도 그랬다. 안아주면 부서질 듯 위태로웠고, 내버려 두면 세상이 무너진 듯 토라졌다. 우리는 미완성이어서 서로를 할퀴었고, 미완성이어서 서로에게 기대었다. 책 속의 문장들은 그 '설명되지 않는 사춘기의 감정'을 무서운 정확도로 포착해 낸다.




2. 선생님 휴게실의 '수박 서리' 사건




책을 읽다 문득 잊고 지낸 기억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릴라와 레누가 동네의 무서운 돈 아킬레를 찾아가던 그날의 심정처럼, 나와 내 친구들도 맹랑하고 겁이 없었다. 단지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선생님 휴게실에 잠입해 수박을 훔쳐 먹었던 날. 붉은 수박 물이 턱으로 흐르는 줄도 모르고 키득거리던 우리는 공범이었고,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영웅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괴물은 되지 못했다. 덜컥 겁이 나고 미안해진 우리는 다음 날, 문고리에 바나나 한 송이를 슬그머니 걸어두고 도망쳤다. 그 바나나는 우리의 알량한 양심이자,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기 전 마지막으로 부린 귀여운 객기였다.




3.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기록




소설은 성인이 된 레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릴라를 기록하기 위해 글을 쓰며 시작된다. 나 역시 이 글을 통해 그 시절의 '나의 눈부신 친구들'을 기록한다. 그때 훔쳐 먹은 수박 맛을, 죄책감에 걸어둔 바나나의 냄새를,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의 초라함과 찬란함을 바닥까지 공유했던 그 시절의 온도를.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눈부신 친구'였고, 서로를 통해 비로소 내가 되었다.





Editor's Note


작가로서 이 책이 경이로운 건, '여자의 우정'을 납작하게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질투, 열등감, 경쟁심... 가장 숨기고 싶은 감정의 밑바닥을 드러냄으로써 역설적으로 가장 단단한 유대를 보여준다. 나의 글도 그랬으면 좋겠다. 예쁜 포장지로 감싼 관계가 아니라, 수박씨처럼 뱉어내고 싶은 날 것의 감정까지 끌어안는 진짜 이야기를 쓰고 싶다.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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