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 당당

계급장, 나이, 재산 다 떼고서도 괜찮은 사람 되기

by 훌륭한어른이
법이나 신, 화폐와 같은 상호주관적 현실은 특정 정보 네트워크 안에서는 엄청나게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네트워크 밖에서는 전혀 의미가 없다. - 유발 하라리 (넥서스) -


"네. 네. 맞습니다."

"알겠습니다."


아마도 회사에서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상급자와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마무리할 수 있는 내 선에서 최선의 말. 대화를 이어가지 않고 건조하고 깔끔하게 마무리하기 위한 방법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대게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익숙하면서도 복잡할 것 없는 뇌의 간단한 명령을 받은 후, 얕은 목구멍에서 반사적으로 툭 튀어 나온다.


"네. 네. 맞습니다."

"알겠습니다."


회사 생활이 생각보다 빨리 길어지는 바람에 후배가 적지 않게 들어왔다. 내가 자주 하고 있는 말들을 후배들에게 자주 듣게된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말에 진심이 담겨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들로부터 진심 없는 입술의 행위를 똑같이 당하고(?)마는 꼴이라 할 수 있겠다. 설사 후배의 말이 거짓으로 들통난다 하더라도 크게 상처받지 않을 것 같다. 그동안의 전력과 퉁쳐서 가볍게 넘기면 그만이다.


회사라는 네트워크 안에서는 연차과 직급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어쩌면 밖에서 별 것 아닐 수 있는 그것들의 영향력이, 회사라는 특정한 규모로 좁혀지면 누가 따로 교육을 시키지 않아도 서로 약속을 맺은 듯, 보이지 않는 뚜렷한 선을 가르며 회사 생활을 한다. 때로는 그게 뭐 큰 대수인지 반발심과 어이없음의 감정이 불현듯 일어날 때도 있지만 이미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오래전부터 학습되어 길들여진 세포는 적극적 돌발 행위의 실천 의지를 희석시킨다.




회사를 계속 다닌다면 사내 네트워크 안에서 유효한 나의 연차와 직급의 힘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허튼소리를 해도 웬만큼 넘어가주고, 별 이유 없이 떠받을어주는 사람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버티기만 하면 쉽게 얻을 수 있는 혜택이기에 기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더 꽁꽁 숨어버리는 꼴이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방어하고 지켜주는 방패는 더욱 두꺼워질 것이다. 처음에는 방패가 약하고 얇다. 그래서 부족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혼도 나고 여러 조언을 듣는다. 그러나 방패가 두꺼워지면 혼이 나고 따분한 조언을 들을 일이 서서히 사라진다. 하지만 그건 그 사람이 훌륭해져서가 아닌 부족함을 적당히 연차와 직급 빨(?)로 넘길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만약 회사 네트워크에서 나름 먹혔던 방패가 바사삭 분해되고 공중분해된다면 나는 뭐가 되는 건가?




그때는 온전한 나로 승부를 봐야 한다. 나 자체로 승부를 봐야 한다.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나는 초라한 모습일까? 당당한 모습일까? 어떤 모습이고 싶은가?


당연히 당당한 모습이고 싶다. 자신 있어서 외부에서 나를 어찌해 주길 바라지 않고, 주도적으로 세상길을 힘차게 헤쳐나갈 수 있었으면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한다.


우선, 회사 네트워크에서 점점 두터워지고 있는 연차와 직급을 차갑게 대해야 한다. 그것들은 나와 별개의 존재로써 나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대상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 대상에 정을 주지 말고, 따뜻하고 온전한 나와 이질적이며 무관할 수 있는 차가운 존재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다음으로 꾸준히 나를 성장시켜야 한다. 회사일은 회사일이고 나란 사람을 성장시킬 수 있는 일과 노력은 별개다. 회사에서 나를 내쫓든, 내가 알아서 나오든 그 이후에도 힘차게 다시 일어서서 밥벌이할 수 있는 능력,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의지라도 있어야 한다. 그 의지는 맨바닥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랫동안 업무 외 쌓아온 노력과 그로 인해 생긴 혜안이 바닥을 단단하게 다져준다. 그런 혜안으로 선택하고 걸어갈 길이 나를 살려주고 뒷받침해 줄 거라는 강함 믿음을 만들어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꾸준히 자기 점검을 해야 한다. 회사 내 상급자를 대하는 후배의 모습은 좋게 말하면 존중과 대우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우쭈쭈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있기에 회사 문화가 어떻게 변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도 그런 우쭈쭈 대상이 될 확률이 있다. 우쭈쭈를 당하다 보면 내 생각, 말, 행동이 대체로 옳다는 착각을 할 수 있다. 그때 전반적인 나의 양식이 예쁘지 않은 모양으로 고착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꾸준히 점검해야 한다. 요즘 세대를 이해하고, 나의 미운 마음을 꾸준히 들여다보며 꾸준히 다듬고 수정해야 한다. 나의 생각이 옳다고 확신을 가지며 다른 이에게 강요하기보다 다양한 생각을 흡수하여 포용해야 한다. 단단하게 굳어버려 손쓰기 어려운 콘크리트 바닥이 되기보다, 부드럽고 감촉 좋은 황토 바닥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람은 알몸으로 태어난다. 그 알몸에 옷 입고, 나이가 붙고, 재산이 붙고, 회사가 따라다닌다. 이런저런 추가 서비스(?) 덕분에 사람이 괜찮아 보이고, 스스로 흡족해하기도 한다.


알몸 상태에서도 괜찮고 훌륭했으면 좋겠다. 나란 사람 자체가 썩 괜찮아서 이런저런 장식품과 숨을 수 있는 방패가 없더라도 상관 없었으면 한다. 그렇게 생각이 될 때, 그렇게 되었을 때 내가 나를 진심으로 칭찬하고, 가장 사랑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계급장, 나이, 재산 다 떼고도 세상 앞에 당당한 나 자신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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