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속에서 익힌 단어라야 활용할 수 있다
호주에서 영어교육학(TESOL) 과정을 밟던 중 한 교수님이 한국 학생들은 수업을 듣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고개를 숙이고 사전을 찾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모르는 단어가 있어도 그냥 수업을 들으면 결국 단어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데 말이다. 단어 뜻을 찾다가 강의 흐름을 놓치면 득보다 실이 더 크다. 차라리 교재에 모르는 단어를 표시해두었다가 쉬는 시간에 찾는 것이 낫다.
이런 태도는 아이가 영어 교재를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있을 때 읽기를 멈추고 사전을 뒤적이는 습관에서 생긴 것이다. 언어학자들은 독서중 자주 단어를 찾으려고 멈추면 집중력과 리듬이 깨지거 흥미가 줄어 좋지 않다고 한다. 강의와 마찬가지로 원서 읽기도 앞뒤 맥락을 통해 단어의 의미를 추측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는 오랫동안 영어 단어장을 암기하는 공부를 했다. 영어를 잘하려면 어휘력이 중요하니 시간 날때마다 암기하라고 수없이 들었다. 자연스런 영어 환경에 많은 노출을 하는 대신 단어 암기로 익숙해진 아이들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함을 느낀다. 아이들에게 원서 읽기를 지도한 경험상, 사전을 찾지 않아도 책을 다 읽은 다음 아이에게 단어의 뜻을 물어보면 이미 알고 있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주변 상황과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말에서 그 단어의 뜻을 유추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르는 단어가 많으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워 줄거리를 파악할 수 없다. 내용을 모르면 재미를 잃는다. 아이가 어렵다고 할 때는 그 아래 수준의 책부타 읽는 것이 더 시간을 절약하는 셈이다.
외국인이 우리나라 말을 배우려고 한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말로 '진지'라는 단어를 몰라 한글 사전에서 뜻을 찾아보았다. '끼니로 먹는 음식을 높여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다. 사전의 뜻을 보고 그 외국인은 '진지'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할까?
"할아버지, 진지 먹었어요?"
음식이라는 단어 대신 '진지'라는 단어로 바꿔서 말한 것이다. 한글 원어민인 우리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나온다.진지'라는 단어는 '먹다'가 아니라 '드시다'나 '잡수다'와 호응하기 때문이다.
어떤 명사는 특정의 동사와 어우러져 사용된다. "할아버지, 진지 드셨어요?"라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한 덩어리로 뭉쳐서 쓰이는 표현은 단어 하나씩 익히기 보다는 문장으로 익히는 것이 실수가 적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뭉쳐서 사용하는 단어의 묶음을 영어로는 collocation(연어)이라고 하는데, 보통 idiom(숙어)라고 배웠다.
'~을 고려하다'라는 표현의 collocation은 take ~ into condiseration이다. 만약 consideration(고려)라는 명사만을 따로 떼어 내어 암기한 사람은 '~을 고려하다'라는 표현을 써야할 때 ' take'와 'into'를 떠울리기 어렵다. 따라서 원어민에게 의미를 올바르게 전달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에 영향을 끼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연어'는 have an influence on ~이다. 영향(influence)이라는 명사만 가지고 '~을 끼치다'라는 'have an ~ on'라는 표현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머뭇거리게 된다.
단어장의 위험성은 또 있다. 영어 단어장에는 유의어와 반의어를 함께 암기하도록 유도한다. 어렸을 때 see, look, watch...의 사전적인 뜻이 모두 '보다' 였기 때문에 같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세가지 단어는 어느 상황이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또, 맥도널드나 치킨 같은 음식을 'fast food'이라고 하는데, fast(빠른)와 동의어인 quick(빠른)로 바꾸어 quick food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fast와 quick라는 단어가 어떤 명사와 결합하는가는 말하는 이가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원어민의 습관이므로 우리가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스꽝스러운 표현이 된다.
반대로 외국인이 우리 말을 배울 때, "저는 강아지 두 명을 키워요."라 말하면 웃음이 나온다. 사람을 세는 단위인 '명'을 알고, 동물을 세는 단위가 '마리'인 것을 익히지 못한 것이다. 틀리게 말해도 문맥으로 이해를 할 수는 있다 해도 언어의 유창성을 높이려면 따로 단어의 뜻을 암기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의사소통을 방해할 위험도 있다. 입시가 코앞이라 바쁜 고등학생이 아니라면 가능한 한 자연스러운 문맥 속에서 단어의 어감을 익히는 방식을 채택하길 바란다.
단어만 따로 암기하는 일이 얼마나 당황스런 상황을 만들 수 있는지 사례를 하나 더 소개한다. 'hawk'라는 단어는 우리말로 '매'다. "그 아이는 ‘매’를 새가 아니라 때리는 매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아이는 매를 맞았다."라는 표현을 "The child was hit by the hawk."라고 표현했다. 웃음이 마구 났다. 아이는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를 알고 얼굴이 빨개졌다.
안타깝게도 이미 고등학교생이라면 단어 암기와 문법 공부 위주로 내신과 수능을 공부하던 방법을 갑자기 전환하기는 어렵다. 고등 시절은 시험 점수가 대학 진학과 직결되기 때문에 하던 대로 지속하게 된다. 그러나 중학생 이하의 아이라면 아직 충분한 시간이 있다. 지금부터 쉽고 재밌는 원서 읽기를 시작한다면 따로 단어 암기를 열심히 공부한 것보다 훨씬 더 실용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등학교 내신과 수능 시험에서도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외국어 학습에 단어 암기는 단순한 보조 수단이어야 한다. 우리 말을 배울 때 아주 가끔씩 단어를 찾고 사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