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아들이 고3이란다. 가뜩이나 공부라는 건 하지 않는 아이가 코로나 시국에 집에서 컴퓨터만 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모의 말은 듣지 않는 것 같은 아들에게 친구 부부는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회사에선 직급이 올라갈수록 책임도 커지는데 아이를 신경쓸 겨를이 없다. 무엇보다 나이가 들어가며 힘이 부친다. 친구는 아들이 대학은 안 가더라도 아들이 자기 앞가림이나 하게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친구 아들과 내가 상담을 해보겠다고 제안했다. 아이들과 상담을 꽤 많이 해본 나로서는 친구의 처지에 도움이 될 수 있길 바랐다. 친구는 소용 없을 거라면서도 한 줄기 희망을 갖고 싶어하는 눈빛을 보였다.
코로나가 터진 후 온라인 수업을 해온 지 2년째, 아들은 밤낮이 완전히 뒤바뀐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침까지 핸드폰과 컴퓨터를 들여다보다 아침 나절에 잠이 들면 저녁 때가 되어야 간신히 일어나면 하루 한 끼 먹기도 어렵다고 했다. 거의 히끼꼬모리처럼 칩거하는 아들을 외부 상담으로 이끄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어렵사리 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상담자가 엄마의 친구라는 사실을 알면 전혀 움직일 것 같지 않아, 친구와 나는 앞으로 "ㅇㅇ 어머님" "선생님"으로 호칭을 철저히 붙일 것을 맹세했다.
"ㅇㅇ야, 대학을 가지 않는 건 어때? 꼭 대학을 나와야 하는 건 아니잖아. 고등학교까진 의무교육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대학은 선택이야. 어떻게 생각해?"
"......"
"대학을 안 가는 대신 먹고 살 방법을 찾으면 되지. 내년이면 성인이니, 부모님한테 의존하며 살 수는 없잖아. 공부가 아니면 뭘로 먹고살지 생각은 해봤어?"
"...... 저 대학 가고 싶은데요....."
"어? 그래? 아~ 그랬구나. 쌤은 그런 생각을 하는 줄 몰랐네. 좋아. 혹시 가고 싶은 학과는 있어?"
"정치학과요. 아니면 사회학과요."
"우와 사회학이나 정치학이라면 구조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구나. 세계사를 엄청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역사학과도 가고 싶다는 생각 해봤어?"
"아뇨."
"그래? 원하는 바가 뚜렷하구나. 잘 됐다. 원하는 방향이 잡혔으니 지금부터 준비하면 되지 뭐. 내가 방향 잡는 것을 도와줄테니 공부는 스스로 해야 돼. 그럴 마음이 있어?"
"네."
고등학교에 와서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마음 속에 하고 싶은 마음이 또아리 치고 있었다 하더라도 방법을 알 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로로 상담하는 입시 컨설팅이 있긴 하지만 주로 상위권 아이들을 위한 정보를 제공한다. 학교에서라도 아이마다 다른 입장과 성향을 고려하여 맞춤형으로 입시 진로 상담을 해주면 좋으련만 교사들도 입시 정보를 따라가기 어려운 데다가 아이들과 예전처럼 신뢰관계가 형성되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게다가, 코로나 형국이 되어 아이들은 등교를 하지 않다보니 학교 선생님들과의 정서적인 연결은 더 느슨해졌다.
내 친구가 서울이나 수도권 대학을 마음에서 지워준 것이 현실적인 공부 방향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내신 성적을 관리한 적이 없는 아이가 고3이 되어서 수시전형으로 서울권 대학을 가는 것은 희박한 가능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인서울이나 수도권 대학을 우선 옵션에서 제외했다. 지방대 정치학과와 사회학과로 선택지를 좁히니 대화가 조금 더 수월해졌다. 지방 대학의 경우 수능에서 3과목 시험 성적만 괜찮으면 갈 수 있는 대학이 꽤 많이 있다. 공부량이 무척 많고 가장 어렵다고들 하는 수학을 아이 마음에서 지워버리도록 해줌으로써 아이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이끌어야 했다.
"지방대학으로 방향을 정하면 수학을 안 해도 원하는 학과를 갈 수 있어."
"수학 안 해도 대학 갈 수 있어요?"
"그럼, 인서울 대학을 가고 싶으면 올해 지방대를 합격한 다음에 재수를 하든 편입을 하든 방법은 있어. 지금은 지방 대학 중에서 네가 원하는 학과를 합격하는 것으로 목표를 잡자. 수능 과목 중에서 3개 과목을 좀 골라보자고."
"네."
"세계사를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네."
"사탐 중에서 세계사를 선택하면 쉽게 1등급이 나오겠네! 집에 수능 기출문제집 집에 있어?"
"아니요. 없는데요. 그게 뭐예요?"
"아, 그건 역대 수능 기출만 모아둔 문제집인데 그거 풀어봐야 지금 현재 수준을 측정할 수 있어. 그래야 얼마나 공부할지랑 어느 대학 쯤 갈 수 있을지를 미리 예측할 수 있지."
"......"
"세계사를 좋아한다는 건 공부머리는 애초에 있었다는 얘기네. 세계사라는 과목이 시대별 사건들을 꿰고 있어야 하는거잖아. 구체적인 사건 내용이나 인과 관계를 잘 파악해야 하는 쉽지 않은 과목인데 말이지."
"......"
"역사나 세계사를 잘하는 아이들은 책을 많이 읽었던데? 독서를 많이 했으면 국어도 빨리 적응할 수 있어. 국어도 포함시켜서 생각해보자고."
"네."
"나머지 한 과목이 남았네. 영어도 괜찮을 듯? 영어도 누군가에겐 그냥 국어잖아. 국어 수준이 좋으면 영어도 잘할 수 있어. 노력이 조금 필요한 거지."
"저 영어 잘 못해요."
"작정하고 해 본 적이 없으니까 당연하지.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준비하면 되는거고. 국어, 영어, 세계사 이 세 과목으로 네가 원하는 정치학과나 사회학과에 도전해보자. 잘 될 거야. 세계사를 잘하니까 한국사도 통과 수준을 넘는 건 어렵지 않을 테고. "
친구가 얘기했던 것과는 달리 이 대화를 이후로 아이는 눈빛에 총명함을 조금씩 회복해 가고 있었다. 공부 방법을 전혀 모르는 아이의 공부는 내가 지도하는 영어 한 과목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아이가 의욕을 내기 시작한 이상 내가 도와줄 것은 공부할 교재를 지정해주고, 아이의 공부 방법을 함께 정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영어 과외교사가 아니라 시험 과목인 국어, 영어, 세계사 과목의 현재 수준을 파악하게 하는 일과 각 과목별로 어떻게 공부해야 할 지 감을 잡을 때까지 멀지만 나에게 찾아와서 수업을 받기로 했다.
공부에 고분고분해 본 적 없는 삐딱한 태도의 아이를 얼르고 달래며 3과목의 기출문제 테스트를 어렵사리 마쳤다. 예상대로 세계사는 이미 1등급이 가능할 것 같았다. 국어도 역사와 세계사 분야 독서를 했던 경험이 있어 바닥은 아닐 것이라 예상했다. 아무 노력없이 4등급 정도에 걸친 점수는 조금 더 노력하면 2-3등급 이상으로 충분히 진입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문제는 영어 과목이었다.
"영어는 17문제가 듣기 평가고, 28문제가 독해야. 영어로 즐기는 거 좀 있어? 팝송이나 영화 같은 거?"
"없는데요."
"그래? 그럼 수능 기출문제집으로 공부하면 재미가 없을텐데... 소설이나 영화 대본 같은 거로 공부해 볼까?"
"싫은데요."
"그럼 어쩌지? 아, 세계사를 좋아하니까 세계사 교재를 같이 읽는 건 어때? 나는 영어를 해석해주고, 난 세계사를 너보다 모를테니까 네가 나에게 세계사를 가르치는 형식으로 말이지.
"네 좋아요."
세계사만 좋아하는 아이를 만나긴 처음이었다. 모든 장르가 싫다는 아이에게 세계사 책을 읽자는 제안이 수락되다니 기뻤다. 예전에 사두었던 <The Story of the World> 시리즈를 가지고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자기가 자신 있고 재밌는 세계사가 교재가 되니 아이는 목소리에 자신감에 가득했다. 선생님이 모르는 것을 잘 가르치고 싶다는 욕심이 표정에 가득했다. 내가 모르는 내용을 설명할 때마다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 신기했다. 내가 모를수록 상황은 유리하게 흘렀다.
"너는 공부를 재미없게 하지 않고 네식대로 해도 좋을 것 같아. 영어로 된 세계사 책을 읽고, 한글로 된 세계사 책도 마음껏 읽어봐. 한국사책을 읽어도 국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돼. 그럼 네가 좋아하는 내용만으로도 대학을 갈 수 있을 것 같아. 단 시험 유형에 익숙해지는 게 꼭 필요하니까 수능 기출문제집을 꾸준히 풀면서 수준을 체크하고, 자신이 없는 부분이 있으면 유튜브나 인터넷 강의 같은 거 찾아서 들으면 실력이 점점 나아질 거 같아. 그리고 네가 가장 좋아하는 세계사는 영어 영상이 훨씬 더 많으니 마음에 드는 유튜버를 구독하면서 놀듯이 하다보면 특히 영어 듣기 평가에 도움이 될거야. 세계사 시험에도 당연 도움이 되겠지만."
몇 달이 지나 아이에게 이젠 혼자서 공부할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아이는 그럴 수 있다고 했다. 뚜렷한 목표가 잡혔고, 공부하는 방법을 알게 된 이상 중요한 것은 스스로 시간을 내서 힘쓰는 일만 남은 것이다. 나와 수업을 하느라 오가는 시간도 아이에겐 큰 시간 손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년쯤 지나 수능 시험보고 좋은 소식 전해달라며 아이와 작별인사를 했다.
시간은 금세 흐르고 어느 날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ㅇㅇ아, 우리 아들 지방대 3곳이나 합격했어. 어디를 갈지 지금 고르느라 고민이다. ㅇㅇ대랑 ㅇㅇ대 정치학과, ㅇㅇ대 사회학과 합격했는데, ㅇㅇ대 정치학과를 꼭 가겠대. 다 네 덕분이야. 고맙다, 친구."
친구가 칭찬해주니 나도 가슴이 뭉클했다.
복잡한 입시 때문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지 모른다. 입시가 예전 학력고사 시절에는 입시체계가 단순해서 이해하기 쉬웠다. 뒤늦게 공부에 철이 들어도 머리띠 질끈 동여매고 공부를 하면 희망이 보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대학을 가기 위해서 어떤 과목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누구와 대화를 나누느야에 따라 다 달라질 정도로 입시는 미로처럼 얽혀있다. 그 미로에 갖혀 아이들은 열정과 자신감과 꿈을 잃고 방황하거나 자책하거나 원망하며 에너지를 빼앗기고 있다. 이렇게 세계사를 좋아하는 아이의 자기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그냥 사라질 뻔 하다니 속상하다. 얼마나 많은 어린 아이들이 방향을 찾지 못해 헤매는지 나는 가까이에게 무수히 많이 보아왔다. 목표와 방향만 뚜렷해지면 돌질할 수 있는 저 많은 에너지가 낭비되고 자신의 잠재력을 갉아먹는 현실이 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