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의 이데아
그를 만나러 가던 신촌에서 대학로의 거리는 온통 샤넬 NO.5로 가득했어
눈에 담기만 할 뿐 가질 능력은 없던 내 젊음에는 먼로가 있었지
샤넬 향수를 입고 잔다던 그녀를 향한 동경과 그 매뉴얼을 따르겠다던 순수
당신은 나의 영원한 멘토, 나는 당신의 순진한 멘티
바람결에 실리던 우리의 찬란함
5번의 미학에 정제된 청춘
그에게 무참히 차였던 날, 5번을 박살 내 버렸다
철없던 내 젊음이여, 아듀
어린 시절, 미국 작은 엄마의 집에서는 항상 달콤한 향이 났어요. 그것은 제게 부잣집 냄새였습니다. ‘부잣집의’라는 형용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지요. 그 형용사는 내게 부러움과 동경의 언어였습니다. 향의 발원을 찾아가던 나의 눈에 반짝거리는 병들이 다가옵니다. 작은 미니어처 향수들은 불규칙하지만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만져볼 수는 없었어요. 그 행위만으로도 이미 타인의 것을 훔치는 것이었거든요. 손대지 않은 채 코를 대고 향만 맡아보았어요. 그것은 훔치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몰래 들여다보고 눈을 맞추고 흔적을 기억하는 것, 내 어린 시절의 가장 비밀스러운 놀이였습니다.
엄마에게는 마른나무 냄새가 났지만 작은 엄마는 달랐습니다. 그것은 내가 속하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달콤했고 배고프게 했고 소유하고 싶었던 탐닉이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엄마와 작은 엄마의 대화를 듣게 되었습니다.
“형님, 샤넬 향수를 속옷에 살짝 뿌려 봐요.”
그 의미를 알기에는 너무 어렸습니다. 사진을 전공했던 그녀는 판탈롱 데님을 입었고 검고 긴 머리는 늘 반짝였으며 그녀가 우리 집에 다녀간 흔적은 향으로 기억되었습니다. 그녀와 비슷한 나이가 되고 나서야 한 사람이 주는 향은 그 존재를 온전히 담아내고 기억하게 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인생에서는 향기조차 롤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지요. 향은 장면을 기억하게 했고 추억을 선물했고 같은 길을 걷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하얀 눈이 펑펑 내리던 겨울밤에 세숫대야에 뜨거운 물을 방으로 들고 와서 가제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던 엄마, 동그란 파란 철 뚜껑 속 뽀얀 크림을 발라주던 언니의 손길. 나는 아늑했을 것이고 아련했을 것입니다. 향들은 나의 어린 시절을 온전히 아름답게 했습니다. 기억들 속에는 안전하고 따사로운 향이 있었어요. 마치 기억과 치유의 향 같은 것이었지요. 작은 엄마의 향은 강렬했고 엄마의 향은 성스러웠으며 할머니의 코티 분에서 뿜어지는 향은 고단한 삶이었습니다. 나로 기록될 향은 무엇일까요?
빛바랜 추억들은 향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고 형상을 남겨줍니다. 향은 나에게 다양한 메시지들을 던집니다.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는 찬란한 미소를, 비 오는 날에는 빗방울의 윤슬처럼 저에게 다가옵니다. 돌이켜보면 갓 스물을 넘긴 나에게 샤넬 5번이 주는 무게감은 버거웠어요. 나의 첫사랑이 무거웠던 것 역시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샤넬의 5번은 나에게 ‘우리 조금 더 철이 들어서 시작할까?’라는 말로 이별을 고했던 것이지요.
시절 인연이라는 말을 생각하곤 합니다. 나에게 그것은 아직은 아니지만 곧 다가올 가까운 미래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5번은 “후훗, 제가 세상을 잘 모르는 그렇게 순진한 여자는 아니랍니다.”라는 말을 과감히 던질 수 있는 팜 파탈의 여성을 찾아가 버렸고요. 돌이켜보니 참 슬프네요.
본 건 많고 마음의 능력은 없던 그때의 나에게는 너무 과분했던 존재와 시절을 소환하며 다시 한번 NO.5를 집어 듭니다. 하지만 이제는 팜 파탈의 용감함과 섹시함을 드러내기에 나는 너무 멀리 와 있군요. 다만 나 역시 한 때는 용감한 향을 내는 젊음이었음을, 하지만 이제는 많은 것들을 포용해 줄 수 있는 향을 보여줄 수 있는 존재로 남았으면 합니다.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여러분들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