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슬픈 사람들은 지금쯤
시드니에서 낮에는 학생으로 밤에는 경기장 청소를 하며 지냈던 적이 있다.
홈부쉬 무어파크, 2000년 하계 올림픽이 열렸던 곳이다. 30여 명의 사람들과 한 팀을 이루어 손바닥보다 조금 큰 걸레를 들고 세 시간 동안 8만 개가 넘는 파란 플라스틱 의자를 닦았다. 쉬는 시간은 없었다. 다들 꺼리는 걸레를 빨기 위해 자진해서 수도까지 가는 시간만이 암묵적 쉬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의자를 닦는 동안 사람들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그곳은 지나쳐가는 곳일 뿐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무어파크에서 알지도 못하는 로컬 럭비 팀을 응원하며 함성을 외쳤다. 경기가 끝나고 흥분에 들떠 친구들과 펍으로 가던 곳.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이었을 때 붉은 티를 입은 나에게 사람들은 코리안? 이라며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경기장 청소를 하는 나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은 없었다. 시선도 주지 않았다. 화려한 불빛과 열기가 사라진 곳은 음식물 쓰레기와 악취만 진동했다. 그곳에서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소속감은 불확실했고 수치와 결핍은 최고조에 달했다. 쓰레기통에서 음식을 뒤적거리던 홈리스들과 애보리진들만이 나에게 미소를 보냈다. 경기장의 밤은 사막보다 건조하고 춥고 외로웠고 밀려난 자들로 가득 찬 곳이었다. 계절도 낮과 밤도 다른 곳에서 같은 손은 다른 것을 들고 있었지만 그게 수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우범지역인 센트럴 파크를 지나도 두렵지 않게 되었다.
그 시절 내 자존감은 바닥이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욕망은 오히려 강해졌다.
그때 만났던 중국인 노인 악사의 해금연주가 기억난다. 현만큼이나 얇은 손으로 연주하던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동전 몇 개를 깡통 속에 넣었다. 그 이후로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몇 번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했다. 그 연주만큼 아련한 곡조를 지금까지도 들어본 적은 없다.
그들과 나, 우리들의 세상은 부조화였다. 하지만 서로에게 건네는 시선만큼은 조화로웠다. 그들이 내게 보여주었던 교훈은 존 버거의 ‘중요한 것은 그런 어긋남 때문에 무엇이 가능해졌는가!’라는 말로 대신한다. 진심으로 그들에게 고맙다.
절실한 불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보신탕을 팔아 대가족을 건사했다. 할머니는 절에 갈 때마다 김 테일러에서 맞춘 양장과 하얀 발목 양말을 신었고 손에는 염주를 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아버지는 방학 때마다 고향집으로 내려와 오토바이 뒷자리에 여자를 바꿔가며 태웠고 여름과 겨울 내내 저수지를 돌다가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모는 여고 앞 분식점에서 DJ를 하며 '어느 소녀의 기도'라는 팝송을 매일 틀었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성경책을 들고 있는 나에게 교회를 다녀도 된다며 쿨하게 말했고, 늙고 병든 아버지는 나약해진 모습으로 그때 나를 더 많이 바라봐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성소수자가 되어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이모는 이 세상에 없다. 그와의 마지막 통화는 삼십만 원만 보내줄 수 있냐는 게 다였다.
우리 모두는 이상하도록 슬픈 시절을 살았던 것 같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고 괴로운 밤과 낮을 가지고 있었다. 강한 척하며 살았던 그들이 마지막에 던진 말들은 후회와 이해를 담았지만 결국 이면에는 결핍이라는 깊은 뿌리였다. 그럼에도 그들 모두 현실에 순응하지 않았다. 각자의 방식으로, 이상한 방식으로 투쟁하며 살아갔다.
내가 쓰고자 하는 것들도 그런 이야기들이다. 추억만 하고 말하지 못한 것들, 말하고 싶었지만 끝까지 침묵해야 했던 것들. 슬픈 한을 눌러 담고 살았던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가 보고 싶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스토리텔러들이며 그들의 이야기가 다시 변형되어 이 세상에 나타난다면 어떤 방식으로 재현될까.
아주 오래된 이야기들, 잊힌 채 남아 있는 기억들을 끌어와 그들이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들과 이 세대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들을 대신 말해주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도 거기에서부터 시작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