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할머니의 화장품

최선이었으나 슬펐을 시절

by 칠리체리

할머니가 그 통을 다시 채웠다.



아직 ‘꼬독꼬독’하게 굳지 않았으니 만지지 말라는 말과 함께 화장대 서랍 깊숙이 넣었다. 할머니는 뒤뜰에서 가지를 따고 있으니 족히 30분은 걸릴 것이다. 지금 이 공간에는 나와 저 금기의 물건밖에 없다. 집안은 고요했고 나는 서랍 여는 소리까지 조심하며 그 물건에 손을 뻗었다. 초록색 뚜껑 위에는 외국 간호사처럼 생긴 여자가 있다. ‘안티푸라민?’ 조심스럽게 뚜껑을 돌렸다.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귀에까지 들린다.


-아··· 예쁘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연등행사에 가기 위해 우리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오늘 같은 날은 할머니의 단장시간이 평소보다 더 길어진다. 나는 할머니가 거울 앞에서 화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했다. 할머니는 얼굴에 그림을 그렸다. 거의 그림이었다. 그랬고 그게 근사했다. 작품 과정을 볼 수 있는 것은 나만의 특권이자 놀이였다. 정적인 시간 속에서 호기심으로 가득 찬 나의 시선은 흥분된 관람자가 된다. 할머니는 세 가지 색만 사용했다. 하얀색과 검은색 그리고 빨간색. 그 색들은 각각 얼굴, 눈썹, 입술을 담당했고 할머니의 손에서 완벽한 심미적 작품을 만들어 냈다. 할머니는 자신의 화장 도구를 삼총사라고 불렀으며 그것을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따뜻한 물이 담긴 세숫대야를 방으로 들고 와, 뽀얗게 삶은 가재수건으로 몽실한 비누거품을 내고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그녀만의 규칙이 있다. 볼과 이마, 턱과 코는 섬세하게 닦았고 뒷목과 귓불은 박박 문질렀다. 검지에 수건을 감아 귓구멍과 콧구멍에 넣어 한 바퀴 돌리면 할머니의 세수 의식은 끝난다. 할머니의 얼굴은 환한 빛이 내리쬐는 호수 같았다. 하지만 거울을 볼 때면 언제나 깊은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굽이굽이 갈라져 있는 깊은 주름들 때문인 듯했다. 그럴 때 할머니는 항상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아아, 댄서의 순정’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나는 그것을 할머니만의 신성한 시간이 시작된다는 신호로 해석했다.

면포에 싼 흰 가루를 얼굴에 묻히고 내가 사용하던 땀띠분으로 얼굴을 두드렸다. 시선이 할머니 손으로 간다. 쭈글쭈글한 손등 위로 툭 튀어나온 푸른 심줄들을 보고 있으면 눈이 찌릿찌릿해지면서 괜히 슬퍼졌지만 하얀 얼굴로 변한 할머니를 보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다음으로 할머니는 미술용 붓을 혀에 올려 침을 묻히고 ‘호랑이 약’ 통에 담아 둔 까만 가루를 섞어서 붓글씨를 쓰듯 눈썹을 그려 나갔다. 하얀 얼굴과 검은 눈썹은 훨씬 할머니를 더 젊게 만들었지만 왠지 바둑알이 생각났다. 물론 그 말은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제 할머니가 그 통을 집어 든다. 나는 바짝 다가앉았다. 뚜껑을 돌리자 그 속에는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빨강 중에서도 가장 근사한 빨강이 존재감을 발했고 그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할머니는 새끼손가락에 그것을 살짝 묻혀서 양 볼과 입술에 콕 찍었다. 양손을 열심히 비벼 열을 낸 다음 손바닥의 가장 두툼한 부분으로 볼을 둥그렇게 뭉개고 남은 것은 입술에 발랐다.


-할머니 나도! 입술을 쭉 뺐다.

-애들은 안 된다

-아, 왜? 나도 바르고 싶어

-애들 바르면 입술 썩는다


만질 수도, 점할 수도 없었던 그것은 의혹과 선망을 넘어 나에게 분노를 일으키는 물건이 되어갔다. 매년 가을이 되면 우리는 마당에 핀 분꽃 가루를 받아서 그것의 씨를 함께 빻아 뽀얀 가루를 만들었다. 할머니는 그 가루를 흰 면포에 감싸고 명주실로 돌돌 말아 화장대 깊숙이 넣어 두고는 특별한 날에만 발랐다. 아궁이에서 골고루 구워진 재를 골라와 그것을 돌로 곱게 갈고 한 번 더 채를 쳐서 눈썹용 잿가루를 만들었다. 할머니가 사용할 화장품을 만드는 우리만의 가을 나기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바르고 있는 저 붉은색은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것은 만지게 하면서 저것만은 허용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 내 입술을 썩게 만든다는 저 붉은 것의 정체가 궁금했다. 아이들은 몰라도 된다는 말에 그냥 몰라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아이라서 모르는 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렇게 입을 닫았다.


-할머니, 어디 있어? 내일은 진짜 김밥 싸줘야······

-내 새끼 왔나? 할매 여기 있다!



시멘트 부엌 바닥이 온통 붉은색이었다. 부드러운 봄바람과 함께 스미는 비릿한 냄새도 진동했다. 할머니 손에 목이 뒤틀린 채 축 늘어진 닭의 목에서는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붉은 그것을 흰 그릇에 받으며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내일은 학교 소풍이다. 지난 소풍 때 친구들과 모여 앉아 도시락 통을 여는 순간 배가 아파서 밥을 못 먹겠다는 핑계로 도시락 뚜껑을 닫았다. 뚝뚝 흐르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더니 진짜 배가 아파지기 시작했고 너무 아파서 집에 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배를 보이며 누워있는 닭백숙과 김치는 열 살 여자 아이의 소풍 점심으로는 잔인했다. 그날의 치욕을 생각하면서 이번에는 한 달 전부터 꼭 햄이 들어간 김밥을 싸달라고 조르고 졸랐다.

그날 저녁 밥상에 닭개장이 올라왔다. 숟가락을 들고 국물을 뜨려는데 순간 낮에 보았던 닭의 눈이 떠올랐다. 죽어가는 닭의 눈알은 검은색 일자 모양의 동공이구나. 그 눈알들이 국에 둥둥 떠다녔다.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 몇 번이나 토했다.

할머니가 흰 간장 종지에 빨간 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뽀얀 분과 섞인 그것은 선명한 분홍색 반죽처럼 변했고 할머니는 거칠고 두꺼운 새끼손가락으로 휘휘 섞더니 그것을 콕 찍어 입술에 발랐다. 거울을 보며 웃는 할머니의 입에서 붉은 닭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눈을 감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런데 할머니가 이불을 벌컥 젖히더니 ‘승아야, 너도 발라줄까?’하며 다가왔다. 할머니 눈은, 동공은 검은색 일자 모양이었다.


-아아악! 싫어, 싫다고!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몸은 뜨거웠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팠다.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할머니의 벌어진 입에서 하얀 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물을 마시려고 주전자에 손을 뻗었는데 화장대에 올려진 안티푸라민 통이 눈에 들어왔다. 뚜껑이 열린 채 아직 다 굳지도 않은 듯 물컹거릴 것 같은 모습을 보는 순간 닭과 할머니의 입과 닭개장이 한꺼번에 생각났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이 낮에 보았던 슬픈 눈처럼 나를 보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가장 큰 돌을 들고 그것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분이 풀릴 때까지, 울음이 멈출 때까지.


나는 할머니의 혈색이 닭백숙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늙으면 고기를 먹어야지 힘이 난다는 할머니의 말뜻을 알지는 못했지만 고기를 먹는 날에는 할머니 얼굴에 고운 분홍색이 돌아서 매일매일 백숙을 먹고 싶다고 거짓말을 했다. 배신감이 들었다. 이제 빨간색을 바르면 할머니 입술은 쥐를 잡아먹은 것 같다고 말할 것이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더 이상 닭을 잡지 않았다. 대신 생선을 잡았다. 하지만 생선을 통째로 올리지 않았다. 꼬리와 대가리를 잘라 통통한 가운데 부분만.


나를 위해 당신의 혈색을 포기한 것일 수도 있었다. 물론 할머니는 붉은 입술은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꽃잎을 빻았다. 봄에는 진달래, 여름에는 봉숭아, 가을에는 백일홍 그리고 겨울에는 도장밥(인주)을 발랐다.


할머니가

많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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