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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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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jury time Nov 13. 2023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7.

쉬는 부부

오키나와 여행 중 치러진 2년 만의 몽크는 서울로 돌아온 우리 부부에게 단 1%의 긍정적인 영향도 주지 못했다. 문제는 서로 너무 참는데서부터 시작인 듯하다. 뭘 자꾸 참고, 꾹 이를 앙다물고, 아닌 척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화가 나있다. 차가운 알몸으로 서로를 안았던 우리 부부는 다음날부터 다시 그렇게 대면대면하게 열심히 <쉬는 부부>로 지내고 있다.


아들이 학교 근처에 오피스텔을 얻어 나가던 날 투닥투닥 말다툼을 한 후, 아내는 서재방에 싸구려 매트리스와 누비이불 한 채를 들여놨다. 그 후로 나는 자연스럽게 서재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자식 눈치 보지 않고 서로 각자의 방에서 생활했다.

 



8인용 식탁 맨 끝과 끝에 앉아 아내와 나는 이른 저녁을 먹는다. 짜지도 달지도 쓰지도 않은 아내의 음식은 로봇이 만들어놓고 간 듯 슴슴하고 맹숭맹숭하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허겁지겁 한입 먹고 나면 식욕이 뚝 떨어지는 신기한 솜씨다.


초등학교 꼬맹이들을 상대로 영어학원을 10년째 운영하고 있는 아내에게 특별한 재주는 따로 있다.

재테크의 귀재.

선생 월급 뻔하지만 장인한테 물려받은 오래된 연탄보일러 주공아파트가 재건축되는 바람에 아내는 목돈을 손에 쥐게 되었고, 그 돈으로 3년마다 이사를 다니면서 지금은 40평대 아파트에, 20평대 전셋집에, 강원도에도 땅을 제법 사두고 땅값 오를 날만 기다리고 있다.


나는 경제관념 제로인 인간이다. 오로지 책 보고 끄적거리는 일이 전부다.

시골 학교로 혈혈단신 내려갔을 때 소일거리 삼아 초창기 브런치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브런치에서는 웹툰을 소개했다. 어릴 적 <각시탈>부터 <열혈강호>까지 다양한 만화책을 섭렵했고, 퇴직하기 전까지 만화 동아리 같은 것들을 학생들과 운영하기도 했다. 브런치에서는 웹툰리뷰어로 활동하면서 한때 여러 분야의 작가들과 활발하게 소통하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퇴직하고 나서부터 열정도 필력도 모두 동력을 잃은 채 문 닫은 지 오래다.


하지만 가끔 sns를 통해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오는 작가가 한 명 있다. 오래된 아이패드에, 오래된 카톡개정. 그곳에 연락처도 없이 카톡으로만 연결된 작가. <예쁜 애>님. 어디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몇 살인지. 서로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그녀와 나는 사이버 유저로 그저 서로를 응원하고 존경하는 그런 독자이자 애정하는 작가의 관계이다.


그 젊은 작가는 자주 들어와 내게 일기를 쓴다.(그냥 글체를 봤을 때 예쁜 애님은 분명 나보다 젊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이른 저녁을 먹고 서재 책상에 앉아 오래된 패드를 꺼냈다. 겨드랑이가 늘어진 하얀색 메리야스 차림이 서늘해 손에 잡히는 대로 현직에 있을 때 얻어 입은 낡은 트레이닝 집업을 걸쳤다. 평생 내가 벗어놓은 팬티와 양말은 손수 빨아야 직성이 풀린다.그리고 그걸 방에 널어놓는다. 나름 가습의 효과를 노렸지만 이런 것 마처 아내와는 마음이 맞지 않는다. 아내는 최신식 가습기를 들여놓자고 했지만 쓸데없는데 돈을 쓰는 게 영 불편하다.

물기에 축 늘어진 쪼글쪼글한 팬티와 양말을 보기 좋게 창가 한 켠에 걸어놓았다. 그리고 한가한 마음으로 사과 한쪽을 씹으며 대화방을 열었다. 잊고 있던 깨알 같은 글상자가 쫘라락 펼쳐졌다. 서둘러 서랍에서 안경을 꺼내 코끝에 걸치고 자리를 잡았다.


이제나가시죠.

목뒤에 귀마개

7층 숲해설가


갑자기 머리가 팅~ 웃음이 나와 책상의자와 함께 뒤집어질 뻔했다. <예쁜 애> 작가가 우리 윗집 고양이 집사란 말인가. 갑자기 전신에 돌던 피가 얼굴로 몰린 듯 얼굴이 벌게지며 등이 쭈뼛 서고,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특히 기품 있는 분. 나는 턱을 괴고 예쁜 애 작가의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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