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저녁 7시 2.

by injury time

취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니 까매졌다는 말이 낫겠다. 온몸에 검은 먹물을 뒤집어쓴 듯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참담함에 목이 메었다. 해수가 끝내 우리를..떠....났.......다. ....


"여보, 가봐야겠어. 당신이 운전해."


아내는 나와 누나의 통화만으로도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서늘한 기운 속에서, 아내는 앞치마에 손을 닦고 서둘러 외투를 들고 나왔다. 그녀가 먼저 현관에 나가 신발을 고쳐 신는 동안에도, 나는 식탁의자에 반쯤 걸터앉은 채 일어설 수 없었다. 해수의 마지막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온몸이 까맣게 타버린 듯 핏기 없는 얼굴. 쇠약해진 그녀의 모습이 마치 어둠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았다 다시 떠올랐다.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가에 뜨거운 것이 맺혔다.


해수를 떠올리면, 나는 언제나 주말 저녁 7시 같은 무력감에 빠진다. 아무 일도 없는데도 마음 한 켠이 허전하고, 해야 할 일이 눈앞에 있음에도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이상한 초조함. 그런 불안과 멍함, 무기력과 정적이 겹겹이 뒤엉켜 가라앉는 그 시간. 그 모든 감정의 밀도는 결국 하나의 감정으로 귀결된다.
아무 기대도 없는 사랑. 해수는 나에게 주말 저녁 7시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해수는 정말로 주말 저녁 7시에 나를 떠났다.


정답 없는 삶 속에서, 나는 그저 내가 정한 해답을 향해 묵묵히 걸어왔다. 옆에는 가족이 있었고, 또 다른 새로운 가족도 생겼으며, 책임져야 할 것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그 사이, 나도 모르게 아집이 자라고, 욕심이 피어났다. 결국, 나는 쓸데없이 평범하기만 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이제 와 가끔, 그 평범해지기 위한 지난한 레이스 도중 스쳐 지나갔던 감정들이 문득문득 수면 위로 떠오른다. 잊은 줄 알았던 감정, 말하지 못한 마음들.
오십을 넘기고, 모든 게 무던해지고 사그라지는 이 나이에도 여전히 선연한 청춘의 기억.


고작 평범해지려고 피니시 라인을 향해 안간힘을 쓰느라 이제서야 여기 이곳에 해수의 이야기를 텍스트로 남기게 된다. 그녀도 내게 수도 없이 남긴 글들이 있기에 나 역시 오늘에서야 글을 통해 지난한 감정들을 직면해 보려 한다.

해수. 아니, 그러니까... 큰누나의 딸, 나와 겨우 다섯 살밖에 차이 나지 않던 여동생 같은 나의 조카, 해수.


사실 나의 청춘은 해수에서 시작되어 해수에게로 점철되었다고 본다.

해수와의 첫 기억은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열두 살쯤 되었던 해수와 함께한 여름에서부터 시작된다. 방학 동안 서울 종합학원에 등록하고 큰누나 집에 머물면서 나는 해수를 처음 만났다. 무진시에서 유명한 딸부잣집 막내 아들로 태어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누나들의 보살핌으로 자랐다. 큰누나는 고등학생 때 벌써 연애를 하고 집을 나가 서울에서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 왕래를 자주 하지 않고 살았던 시절이라 더 어릴 때 해수와의 기억이 전혀 없는 걸 보면, 그 여름이 우리의 사이가 진짜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해수는 서울 아이답게 하얗고 여린 아이였다. 해수의 어린 시절은 땀으로 기억한다. 조근조근 속삭이는 아이의 모습은 그 당시 라붐에 나오는 소피마르소 같았다. 검고 맑은 눈동자와 땀에 젖은 목덜미의 잔머리가 인상적이었던 조카 해수. 마치 우주의 어느 별에서 뚝 떨어져 나왔다가 우연히 뚫린 달의 구멍으로 들어온 별똥별처럼 해수는 그렇게 반짝이며 내게 나타났다. 적어도 사춘기 시절 청춘의 열일곱 사내아이에게 해수는 그런 느낌이었다.


처음에 해수는 나를 낯설어했지만 어느 여름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를 손에 쥔 채 내 무릎에 기대어 “삼촌, 삼촌” 하고 속삭이면서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 후 해수는 매일같이 내 무릎을 놓지 않았다. 여동생 하나 없이 자란 내게 해수는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해수가 나에게 매달릴 때마다 나는 괜스레 어른스러운 척, 의젓한 삼촌의 면모를 보이려 애썼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는 해수를 볼 때마다, 나는 어쩐지 가슴이 쿵쾅거릴 만큼 어색해져 갔다. 아마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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