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를 치르고 서울로 다시 입성한 후에는 한동안 해수를 보지 못했다.
해수를 다시 본건 몇 년 후 군복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누나 식구들이 대표로 면회를 왔었다. 몇 달만의 면회라 너무나 반가운 마음으로 연병장을 달려 야외 접견장으로 나갔다.
"충성! 이등병 ooo 면회신청받고 나왔습니다."
누나가 보따리 보따리 가득 음식장만을 해가지고 왔다. 그리고 식구들 맨 끝에 해수가 훤칠하게 자란 모습으로 다람쥐처럼 누나 뒤를 따라왔다. 한 오 년 만인가? 해수는 벌써 대학생이라고 했다. 짧은 숏츠 반바지 차림에 청남방 단추를 두 개나 풀고 나타났다. 해수는 내무반 개인사물함마다 붙어있는 그 어떤 사진 속 여자친구들보다 눈이 부셨다.
"삼촌~"
해수가 어색하게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야들거리고 힘없이 하얀 손이 내 손안에 들어왔다.
"야, 너 많이 컸다. 짜식."
그날, 나는 해수를 보며 조카도, 여동생도 아닌 정체 모를 감정이 내 안에서 일렁였고, 그 감정은 불안함과 설렘이 뒤섞인 채 나를 흔들었다. 이 감정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몰라 더 혼란스러웠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려나. 한밤 중에 잠에서 깬 날이면 해수 생각을 했다. 그때만큼은 그녀가 내게 달큰한 여자였음을 실토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 당시 어렸다. 팍팍한 군 생활은 해수를 여자로 집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감정을 내려놓은 채 나는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청춘을 달렸다.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게 일견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내 마음만 아주 단순하게, 소리 없이 정리하면 될 문제였다.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복학 후 취업 준비에 허덕이던 어느 겨울, 해수가 다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내가 살던 오피스텔 앞에서 해수가 눈을 잔뜩 뒤집어쓴 채 서 있었다. 얼어붙은 볼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눈에 젖은 흰 운동화는 위태롭게 보였다. 그 순간, 후회와 안도, 그리고 알 수 없는 아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지나가는 길이야.”
해수는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러나 그 눈빛에는 망설임과 기대가 겹쳐 있었다. 그 말 한마디에 아무 말 없이 목에 두르고 있던 감색 체크무늬 목도리를 풀어 해수의 목에 감아주었다. 그녀의 좁은 어깨에 손이 닿는 순간, 얼어붙은 시간에 균열이 생기는 듯했다.
그날 이후 해수는 가끔 불쑥 찾아왔다. 나는 책임질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르며 밥을 먹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 속에서 우리는 그저 머물렀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서로를 기다렸다.
우리는 서로 닮은 점이 많았다. 수학보다 영어를, 영어보다 문학을 좋아했고, 무엇보다 인과의 세계에서 ‘우연’을 만들어내는 전치사 ‘by’를 사랑했다. by fate, by luck—그 말들을 마치 주문처럼 주고받았다.
이상과 김유정의 문장에서 힘 있는 구절을 발견하면 서로에게 소리 내어 읽어주곤 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우주 어딘가에 다른 모습으로 살아 있을 거라고 믿었고, 언젠가 함께 그의 신호를 찾으러 가자며 웃었다.
치킨 심장을 씹으며 영화 <샤이닝>의 공포를 맛보았고, 도토리비빔면을 먹으며 태평양 거북이 등에 붙어사는 따개비를 원망했다. 해수는 따듯하고 뜨거운 여자였다.
그리고 그날이었다. 어느 주말 저녁 늦게 해수가 나를 찾아왔다. 급하게 만든 카레라이스와 청아 한 잔이 우리 사이를 채웠다. 해수는 말없이 숟가락을 움직였고, 나는 조용히 통통한 술잔에 똘똘똘똘 맑은 청아를 따라 홀짝였다. 부드럽고 뜨거운 게 목구멍 안으로 미끄러지듯 넘어가던 날, 그날의 청아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소파 밑에 등을 기대고 앉아 이따금씩 힘없이 가늘고 여린 해수의 손끝이 닿을 때마다 내 얼굴과 목구멍과 심장이 뜨거워져 온몸이 데워지고 있었다.
마지막 잔을 비우려던 찰나, 해수가 갑자기 내 셔츠를 잡아끌었다. 아무 말도 없었고, 피할 틈도 없었다. 그게 처음이었다. 어리숙한 나는 해수를 처음 여자로 안았다. 해수의 혀 끝에서는 쉴 새 없이 달달한 침이 흘러내렸고, 연한 꽃잎처럼 해수는 내 옆에 촉촉이 젖어있었다. 나는 해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한 번도 해수를 방 안으로 들인 적은 없었다. 매번 별 볼 일 없이 작고 초라한 내 집 거실 소파에 앉아 재즈를 듣거나 컵라면에 청포도 통조림을 먹던 게 다였다.
그날 우리는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 조용히, 단단히 우리의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마침내 그녀의 숲으로 들어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우리의 관계는 선을 넘었다. 그 시간들은 조카와 삼촌이라는 명목을 넘어, 말없이 스며드는 공기처럼 서로에게 스며든 사이였다. 해수는 그렇게 나에게는 청춘의 잊히지 않는 주홍글씨가 되어갔다.
우리의 관계는 세상 밖에서는 스쳐 지나가는 건조한 상태로 여전히 먼지처럼 떠다녔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세상과 단절된 채 숨어들기 좋은, 좁고 작은 오피스텔 안에서 같은 시간을 건너는 두 존재였다. 오렌지빛 스탠드 불빛은 그 시간만큼이나 뜨겁게 타올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