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몇 번 바뀌는 사이, 나는 작은 방송국의 PD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해수는 언제나 곁에서 글을 썼고, 나는 그 글을 가장 먼저 읽는 사람이었다. 해수의 글은 그녀를 닮아 투명하고 예민했다. 마치 햇살 아래 반짝이는 파닥파닥 청어 같았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해수가 등단을 하고 난 후부터 나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해수의 글 속엔 조심스럽게 숨겨진 감정의 파편들이 있었다. 누구보다 섬세한 언어를 가진 해수였기에, 그녀의 글에서는 명확히 말하지 않아도 해수와 나만 아는 '우리'가 있었고, 처음에는 그 글들이 나에게는 숨은 그림 찾기나, 비밀스러운 도장 깨기 게임처럼 흥미롭기만 했다. 하지만 해수의 글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누군가 해수의 글을 읽고 해수와 나의 사랑을 알아챌까 봐. 사랑이었다는 것을 들키는 순간, 우리는 그 자리에서 단단한 바위로 변해버릴까 봐 겁이 났다.
마침내 나는 도망치듯 고향 후배와 결혼했다. 다정하고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 선택이 옳은 선택이라고, 스스로 수없이 다짐하며 살았다.
몇 달 후, 해수도 갑작스레 결혼 소식을 전해왔다. 나는 묘한 안도감과 함께 깊은 슬픔을 느꼈다. 그 후로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마음 한켠엔 언제나 해수가 있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삶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서로를 응원하며, 동시에 외면했다.
사랑이 아니었던가, 나는 비겁한 인간이다.
해수를 마지막으로 본건 석 달 전쯤이었다.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숨겨야 하는 죄책감 따위는 잊은 채 한달음에 달려갔다. 해수는 내내 혼자 지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백지처럼 맑아 보일 뿐이었다. 뿐이었다.
"식구들은?"
"아들은 학교 가고, 남편은 회사 갔지. 돈 벌어야지. 병원비 대려면.. 하하"
해수는 애써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려 했지만 그녀의 입술은 미세하게 떨렸고, 말끝은 자꾸 끊겼다. 숨을 고르고, 겨우겨우 한 마디씩 내뱉는 그녀의 모습은 보기 아팠다.
해수가 췌장암이라는 소식을 듣고도 한번 찾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내내 해수는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했고, 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톡 프로필에 아들이랑 숲을 오르는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기에 괜찮은 줄만 알았다. 한번 봐야지, 봐야지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었다.
그녀의 집으로 찾아간 날. 해수는 지팡이를 짚고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실내에서도 니트모자를 푹 눌러쓴 해수. 그 모습은 믿기 힘들 만큼 낯설고도 처연했다.
마흔다섯, 겨우 마흔다섯이었다.
"삼촌, 오랜만이야. 좋은 모습으로 만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됐네.. 밥은 먹었어?"
해수는 흔들리는 몸을 지팡이에 의지하며 나를 거실로 안내했다. 해수의 거실은 먼지 낀 붉은 암막커튼과 대형티브이와 시들어가는 행운목과 유리선반에 전시된 해수의 문학상 상패가 전부였다. 해수가 처음 등단을 하던 때 내가 선물해 준 몽블랑 만년필도 상패 사이에 상자 그대로 놓여있었다.
건강했던 해수를 떠올리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는 주저앉을 뻔했다. 환자용 전동침대. 해수의 거실에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운 환자용 침대를 보는 순간 비통함에 눈앞이 깜깜했다. 얼마나 그곳에 누워서 생활했는지 해수의 침대 시트는 자글자글 구겨지고 푹 꺼져있었다. 해수의 고통이 푹 꺼진 침대 시트에 온전히 새겨져 있는 듯했다. 얼마나 속이 상하던지. 해수는 내가 침대에 눈길을 두자, 멋쩍은 듯 담요로 재빨리 침대를 덮으며 웃었다.
"방이 너무 답답해서 침대를 여기로 빼놨어."
"그래. 잘했다. 아니, 대체 이렇게 혼자 있어도 되는 거야?"
"그럼. 혼자 있지 누가 같이 있어줘. 원래도 혼자였는데."
해수는 늘 혼자였었다. 어린 아들과 남편이 해수에게는 전부였으나 해수는 늘 혼자였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해수의 남편은 영세한 출판사 사장이었는데 해수의 소설이 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에 이름을 알리게 되자 해수를 이용해서 돈을 벌려는 허튼 생각으로 가득 찬 인간이었다. 일전에 나에게도 찾아와서 재능이 있는 조카를 위해 투자 좀 하라며 자신이 기획하는 영화 사업을 늘어놓으며 발가락을 파다 간 적이 있었다. 아주 무례하고 건들거리는 폼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섣불리 해수에게 연락해 남편에 대해 물을 수는 없었다.
가족 행사에서 이따금씩 만나 잘 지내냐고 물으면 '걱정 마. 잘 지내. 삼촌이나 잘 지내.' 했지만 결혼 생활 내내 해수의 얼굴은 어두워 보였다.
"병원은 어떻게 다녀?"
"택시 타고 다니지. 이제는 밥도 다 시켜 먹는걸. 나 팔자 편해졌어. 아참, 삼촌, 마실 걸 좀 줘야지."
해수는 냉장고를 열어 주스병을 꺼내려했다.
"해수야, 내가 할게. 그만 앉아 있어."
해수의 팔목을 잡고 돌아세웠다. 해수에게 시큼한 이불 홑청 냄새가 났다. 어릴 때는 언제나 시원한 비누냄새만 났던 것 같은데 어느새 해수는 늙어버린 걸까. 가느다란 해수의 어깨를 감싸 조심스럽게 다시 거실로 돌아와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주스 한 잔을 들고 해수에게 다가가 앉았다.
"미안하다. 삼촌이. 진작 와봤어야 하는데. 정말 미안해."
"아니야, 뭐 좋은 꼴이라고. 금방 나을 거야. 걱정하지 마."
"항암치료받는 중이라고? 좀 어때?"
"벌써 열일곱 번째야.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의사가 하라는 대로. 설마 죽기야 하겠어!"
해수는 초점 없는 눈동자로 내가 들고 있는 주스잔만 들여다보았다.
"아참, 저거."
병세가 짙은 해수에게 놀라 들고 온 과일 바구니를 문 앞에 그냥 내려놓고 들어왔다. 현관문 앞에 내려놓은 과일바구니를 들고 "뭐 좀 먹자. 내가 정리해서 가져올게."라며 주방으로 향했다. 해수는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이내 다시 제자리에 앉아 지팡이만 의지하며 기대 있었다. 해수가 좋아했던 청포도를 씻어 내왔는데 어느새 해수는 침대에 반쯤 기대어 낮은 숨을 쉬고 있었다.
"이제 와서 삼촌, 참 신기해. 물욕이 생겼어. 예쁜 옷을 그렇게 사고 싶은지 몰라.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티브이에 나오는 옷들이 다 예쁘고 갖고 싶고, 입고 싶어. 이 꼴로 잘 어울릴지 모르지만. 하루 종일 텔레비전 홈쇼핑만 틀어놓은다니까 하... 하."
씁쓸하게 웃으며 니트 모자를 푹 눌러쓰는 해수, 그게 마지막이었다. 항암치료로 지칠 대로 지친 해수의 모습을 본 그날이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