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롤보다 느린 것들을 사랑하고 싶다.

by yuri

이상하게 읽히지 않는 책

『경험의 멸종』을 읽는 내내 내용은 이해가 잘 되는데, 이상하게 글이 머릿속에 들지 않았다. 책장이 영 넘어가지 않아 ‘아, 내가 드디어 독해력이 떨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결국 국어 선생님께 달려가 하소연했다.

“선생님, 요즘 글이 안 읽혀요. 어떡하죠?”
“그럴 땐 그냥 계속 읽으면 돼요. 자주 읽다 보면 어느새 나아져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며칠 동안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같은 국내 작가들의 책을 읽었다. 원래 책 읽는 속도가 느린 편이지만 술술 읽어진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나의 독해력!” 하고 속으로 환호했다.

그래서 다시 『경험의 멸종』으로 돌아갔는데 —
역시 또 느렸다.


스크롤에 빼앗긴 집중

읽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내용은 오래 기억에 남는 책이었다.
『도둑맞은 집중력』과 일부 겹치는 내용이 있었는데 요즘 SNS 회사들은 사람들이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에 더 오래 머물길 원한다. 무한 스크롤, 쉼 없이 울리는 알림...

기술은 분명 세상을 편리하게 만들었다. 서로 만나지 않아도 소식을 전할 수 있고, 정보는 순식간에 퍼져나간다. 하지만 편리함의 속도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몸에 밴다.
그 불안이야말로 SNS의 가장 강력한 알고리즘일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쥐여주지 않는 사람들

스티브잡스는 자신의 아이에게는 스마트폰을 쥐여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참 아이러니하다. 스마트폰을 만들고 파는 사람조차, 그 위험을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아이의 영상 노출을 무조건 막는 게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절’은 분명 필요하다.
왜냐하면 영상 속 경험 대부분은 ‘편집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건 언제나 더 재미있고, 더 화려하며, 더 완벽하다.
내가 직접 겪지 않아도 만족감을 준다.
하지만 그런 대리 경험은 결국 내 것이 아니다.
아무리 많이 본다 해도, 그것이 나를 성장시키진 못한다.


나르키소스의 거울 속에서

요즘의 나는 가끔, ‘현대의 나르키소스’를 떠올린다. 온라인 속의 영상과, 이미지들을 사랑하다 결국 그 속으로 빠져든 사람들. 빛나는 화면 속 사람들의 모습에 빠져 현실의 자신을 돌보는 일을 잊은 우리들.

인플루언서들은 자신들의 오프라인 경험을 영상으로 팔고, 우리는 그 영상을 보며 잠시나마 그들의 삶을 훔쳐본다. 그 순간은 짜릿하지만, 금세 허무가 찾아온다. 결국 부자는 경험을 팔아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남의 경험을 그저 소비할 뿐이다. 그 불균형한 풍경 속에서, 나는 문득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본다.


진짜 경험으로 살아가기

요즘은 아이에게 영상을 보여주는 일이 조금 무섭다. 하지만 영상을 보여준다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중요한 건 영상을 보며 익힌 경험이 현실로 이어지는가 아닌가의 문제다.

온라인에서 본 것이 오프라인의 내 삶으로 이어질 때, 그제야 그것은 진짜 ‘나의 경험’이 된다.

화면은 늘 빠르고, 현실은 언제나 느리다. 그러나 느린 것들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단단하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SNS 인증샷에 열광하는 것은 반대하는 편이다. 인증샷에 열광하다 보면 오프라인에서의 경험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테니까... 추억을 위해 영상과 사진을 열심히 찍는 건 어쩌면 지금 내가 서 있는 현실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게 하는 방해요소로 작용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추억을 회상하기 위해 모든 것을 영상으로 남기고 사진을 찍는 것은 우리의 경험을 카메라라는 중간제를 거쳐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간제가 있으면 아무래도 경험이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찍은 영상과 사진을 통해 경험하는 것과 직접 가서 경험하는 것 간의 차이가 거의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을 경험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기술의 개입을 최소한으로 하는 게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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