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교무실 책상에 산처럼 쌓인 논술형 답안지를 채점하며 나지막이 비명을 지른다.
“신이시여, 왜 저에게 이런 철학적 고뇌를 주시나이까!”
나는 자타공인 ‘기술 찬양론자’다. 이공계 전공인 동생이 복잡한 암산 대신 공학 계산기와 컴퓨터로 정교한 설계를 해내는 것을 보며 확신했다. 도구의 발전은 인간을 단순 노동에서 해방하고, 더 고차원적인 창의의 영역으로 밀어 올려준다고. 그래서 나의 음악 수업은 언제나 최신 기술의 실험장이다. AI로 선율을 짓고, 기계가 만든 매끄러운 음악과 인간의 서툰 연주를 비교하며 ‘결핍의 미학’을 논한다.
논술 시험에서도 나는 파격을 제안한다. “문제를 공개할 테니 AI를 마음껏 활용해라. 대신 AI라는 매력적인 거짓말쟁이를 이기기 위해 제미나이와 챗GPT를 교차 검증하고, 그 답변의 뿌리를 찾아내라.” 질문의 기술부터 검증의 경로까지, 나는 아이들에게 가장 완벽한 ‘지식의 사다리’를 놓아주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아이들의 사고는, 역설적으로 더 낮고 평평해졌다.
공부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우주의 지식까지 클릭 한 번으로 끌어올 수 있는 고해상도의 시대건만, 아이들이 내놓은 답안지는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저화질의 복사본’ 같다.
완전히 이해하고 씹어 삼킨 글은 긴장과 이완이 조화를 이룬 화성적 짜임새를 가지지만, 타인의 생각을 대충 빌려온 글에서는 불쾌한 불협화음이 여기저기서 울린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고리는 느슨하고, 핵심을 꿰뚫는 논리의 선율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내 채점지에는 정답 체크 대신 물음표만 가득 쌓여간다.
아이들은 AI와 대화하지 않는다. 그저 ‘가장 가성비 좋은 답’을 주문하고 배달받을 뿐이다. 실패를 혐오하고 효율에 집착하는 시대의 풍경이 교실까지 침투한 결과다. 맛집을 찾을 때 실패하지 않으려 ‘핫플’과 ‘유행’에 매몰되듯, 아이들은 ‘내 생각’을 만드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검증된 정답’을 복사하는 안전함을 택한다. 스스로 길을 잃고 헤매며 근육을 키워야 할 시간과 여력은 ‘가성비’라는 이름 아래 처단된다.
비극은 여기서 발생한다. 교육부는 사고력을 키우라며 논술형 평가를 확대하지만, 정작 정답이 없는 정글로 나갈 아이들은 ‘정답이 정해진 공부’에만 익숙해져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답이 있는 시험에서 나만의 생각을 펼치는 것은 일종의 ‘리스크’다. 나만의 관점을 가질수록 머릿속엔 물음표가 늘어나고, 그 물음표가 많을수록 정해진 정답지에서는 멀어지기 때문이다. 점수라는 지표 앞에서 아이들은 어느 순간 생각하는 근육을 스스로 퇴화시키는 쪽을 선택했다.
나는 확신한다. 기술이 최고조에 달할수록, 결국 마지막에 살아남는 것은 ‘혼자서 고독하게 생각하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다. AI가 몇 초 만에 뱉어낸 매끈한 문장보다, 비록 투박하고 거칠지언정 자신의 고통과 고민이 담긴 서툰 한 문장이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다.
채점을 멈추고 창밖을 본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주인공이 입버릇처럼 던지던 말이 귓가를 스친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이 질문은 이제 내가 아이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의 사고를 향해 던져야 할 질문이다.
정답이 없는 사회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완벽한 AI의 답안지가 아니다. ‘이게 정말 맞는 말인가?’, ‘더 좋은 해결책은 없는가?’를 끊임없이 되묻는 끈질기고 집요한 마음이다. 그 물음표들이 모여 비로소 아이들만의 아름다운 인생 교향곡이 완성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