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똑똑하면 돈을 잘 벌 것이라는 착각을 합니다. 유명 증권회사의 펀드 매니저들은 하나같이 화려한 학력들을 자랑합니다.
아이작 뉴턴은 과학적으로 엄청난 성취를 이룬 인물이지만, 주식 투자에서는 큰 실패를 경험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1720년 영국의 "사우스 시 컴퍼니"(South Sea Company) 회사의 주식을 사서 상당한 이익을 얻었지만, 이후 주가가 더 오를 것이라고 생각해 다시 투자를 했습니다. 그러나 곧 거품이 터지며 주가는 폭락했고,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금액인 약 2만 파운드를 잃었다고 합니다. 이는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20억(40억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음)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 사건 후, 뉴턴은 "별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사람들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뉴턴의 투자 차트
아이작 뉴턴과 반대로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은 "사우스 시 컴퍼니" 주식으로 큰돈을 벌었는데 그는뉴턴과 달리 주가가 최고점에 달하기 전에 주식을 팔아 이익을 실현했습니다. 때문에 많은 투자자들이 손실을 입은 것과 달리 피해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뉴턴과 헨델의 투자 차트 비교
헨델은 경제 공부를 한 적은 없지만 헨델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눈치가 빠른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헨델이 태어난 독일은 이미 바흐와 같은 작곡가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 푸가처럼 대위법을 사용한 복잡한 스타일의 음악이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반면 헨델의 음악은 단조로우면서 드라마틱한 요소가 강한 것이 특징입니다. 때문에 독일의 하노버에서는 그의 주특기인 ‘오페라 솜씨’를 마음껏 발휘할 수가 없었습니다.
헨델이 악장에 취임하고 얼마 안 되어 1년의 휴가를 얻어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게 됐는데 헨델의 음악 스타일처럼 단조로우면서 선율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영국은 헨델에게 열광하게 됩니다.
성공 후에 그는 일단 하노버로 다시 돌아왔으나 15개월 후 재차 휴가를 얻어 또 한 번 영국 땅을 밟고 이번에도 역시나 그의 음악은 크게 호평을 받았습니다.
앤 여왕의 총애를 받은 후 런던이 완전히 마음에 든 그는 휴가가 끝난 후에도 귀국하라는 명령을 무시한 채 영국에 머물게 됩니다.
18세기 초반 영국은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강국으로 부상한 시기였습니다. 해상 무역과 식민지 확장에 집중하며 강력한 해상 강국으로 부상했습니다. 설탕, 커피, 차, 면화, 향신료 등과 같은 상품들을 식민지에서 수입하여 유럽과 전 세계에 재수출하며 경제적으로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헨델은 당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한 곳인 영국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음악 활동을 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리며 음악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왕실의 후원을 받고 있는 음악가답게 왕실을 위한 곡들을 많이 작곡하는데 1714년 49세의 앤 여왕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하노버의 게오르그 선제후가 영국의 왕위를 물려받아 조지 1세가 되었습니다. 헨델은 그동안 하노버 선제후(=조지 1세)와의 약속을 어기고 런던에 계속 머물러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의 환심을 사야만 했습니다.
<수상음악>(Water Music)은 영국의 왕인 조지 1세가 런던 템스강에서 개최한 배 타기 행사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곡입니다.
1717년 7월 17일 헨델은 조지 1세와 그의 측근들이 탄 배 앞에서 50명의 연주자를 배에 태워 공연을 했는데 조지 1세는 이 곡을 무척 좋아하여 지친 악사들로 하여금 이 곡을 세 번이나 더 연주하도록 명령했다고 합니다.
<수상음악>에는 바로크 시대에 꼭 있어야 할 악기인 하프시코드가 없는데 그 이유는 크기가 너무 커 배에 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크 시대는 보통 10~30명 정도의 연주자로 구성되는데 50명에 달하는 오케스트라 규모는 당시에는 매우 이례적이었습니다.
이 곡을 계기로 헨델은 왕의 환심을 얻어 왕으로부터 매년 연금을 받으면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왕굴이 불꽃놀이"는 국왕 조지 2세의 의뢰를 받아 작곡한 곡으로 1749년 런던 그린파크에서 개최된 불꽃놀이를 위해 만든 곡입니다.
불꽃놀이는 1748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 종식되고 엑스라샤펠 조약이 체결되었음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였는데 결과적으로 음악을 대성공을 하였지만 불꽃놀이의 핵심이었던 회전불꽃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작은 화재가 발생해 일부 구조물이 손상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1749년 5월 15일 월요일에 템스 강과 리치먼드 공작의 화이트홀에서 열린 불꽃놀이와 조명 광경
초반에 헨델은 오페라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1730년대에 런던의 오페라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면서, 경쟁이 치열해졌고 카스트라토 가수들의 높은 출연료와 무대 제작비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가게 됐습니다. 거기에 더해 결과적으로 헨델의 오페라가 인기를 잃게 되면서 그는 재정적으로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이에 헨델은 '제작하는데 돈은 적게 들지만 많은 관객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헨델이 활동하던 당시 영국은 기독교(앙글리칸 교회)를 국교로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헨델은 더 많은 관객을 끌어모으기 위해 성경 이야기나 영웅적 서사 등을 주제로 삼는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합니다.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와 달리 무대장치, 의상 등을 사용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오페라에 비해 제작비가 덜 들어갑니다. 더군다나 영어로 부르는 오라토리오를 만들면서 귀족층 뿐만 아니라 잠재력 있는 중산층의 수요까지 끌어당길 수 있었습니다. 내용도 사람들의 호불호가 거의 갈리지 않는 종교적 이야기로 선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헨델의 오라토리오는 대성공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유명한 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삶, 수난을 고스란히 담은 걸작인데 "할렐루야"라는 곡이 제일 유명합니다.
조지 2세는 "할렐루야"를 듣고 몹시 감동하여 공연 중 벌떡 일어나 서서 음악을 감상했고 이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할렐루야"가 나오면 청중들은 기립해서 음악을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1945년 12월 16일 미국의 대학음악소사이어티에서 헨델의 메시아 중 ‘할렐루야’를 공연할 때 청중들이 기립해 있는 모습
헨델을 보면 작곡 능력만큼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독일에서는 크게 성공하기 힘드니 자신의 음악적 스타일을 사랑하고 재정적 지원을 많이 해줄 수 있는 영국으로 귀화합니다.
오페라로 파산 직전까지 갔으나 이를 타개하고자 사람들의 취향을 잘 분석해 오라토리오를 큰 성공을 거둡니다.
헨델은 외국인 신분으로는 몇 안 되는 영국의 공작 직위를 받은 인물 중 하나입니다.
1759년 4월 14일에 세상을 떠난 헨델은 영국 왕실과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인물로서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왕족과 국가의 주요 인물들이 묻히는 장소로, 헨델이 이곳에 안치됐다는 말은 그가 얼마나 영국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겨졌는지 알게 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