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

by sepr


요즘 들어 방이 이상하게 넓게 느껴진다

물건은 그대로인데 공간이 조금씩 커진 것 같다

그 안에서 나는 점점 작아진다


방 안은 정리되어 있고 책상 위에는 미뤄둔 일기장이 있다

펜을 잡았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한다

쓰고 싶은 건 많지만 막상 적으려 하면 한 단어도 떠오르지 않는다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집히지 않는다

그게 공허함의 모양인 것 같다

텅 빈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들로 가득 차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


가끔은 그 상태가 무섭다

마음이 비어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감정이 너무 많아서

내 안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는 걸 깨닫는 순간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미움도

모두 같은 색으로 흐려져 버린다

그래서 나는 그냥 조용히 숨을 고른다

공허함 속에서는 어떤 말도 진심 같지 않아서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은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 표정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나조차 모르겠다

피곤함인지 그리움인지 아니면 그저

익숙해진 공허함인지


가끔은 이게 나만의 문제 같다가도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공백을 겪는 게 아닐까 싶다

바쁘게 살고 사람들과 웃고 떠들다가도

문을 닫는 순간 갑자기 고요가 찾아온다

그 고요함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낯설어진다

지금 내가 정말 괜찮은 건지

아니면 괜찮은 척을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공허함은 생각보다 일상적인 감정이다

우리는 그것을 피하려고 늘 무언가로 채운다.

사람을 만나고 음악을 틀고 SNS를 뒤적이며

빈 공간을 덮어버리려 애쓴다

하지만 결국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조용한 방 불 꺼진 천장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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