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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두 사람, 관계를 통한 다른 결말

소설 「일곱 번째는 내가 아니다」와 영화 「줄스」의 연결고리

by Melvine

연결고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를 연결해 보는 작업은 참 흥미롭다. 소설 「일곱 번째는 내가 아니다」를 읽고 영화 「줄스」를 관람하며, 나는 이 두 작품 사이에서 희미한 연결고리를 발견했다. 얼핏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꽤나 닮은 구석이 있다.


두 작품의 주인공은 자신의 공간에서 존재감 없이 살아간다. 조는 크라이스트처치라는 도시에서, 밀턴은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마을 분턴에서 투명인간처럼 산다.


경찰서 청소부 조는 대도시의 익명성 속에 숨는다. 매일 밤 경찰서 복도를 걸레질하며, 형사들의 책상을 닦고, 증거보관실 앞을 지나친다. 형사들은 그와 대화도 하지만 그의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수백만 명이 오가는 거리, 누구도 누구를 기억하지 않는 도시.

조는 이 투명함을 정교하게 계산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눌한 말투, 순진한 표정, 고개를 숙이고 걷는 자세. 그가 밤마다 여성을 살해하고, 새벽에는 범죄 현장을 청소하듯 증거를 지운다는 것을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다. 범인을 잡고자 형사가 뛰어다니는 경찰서에서 일하는 청소부가 연쇄살인마일 리 없다고, 도시는 믿어주는 것 같다. 아니, 내 생각엔 도시는 그것조차 관심이 없다.


펜실베이니아 작은 마을의 노인 밀턴은 다르다. 여기서는 모두가 서로를 안다. 마트에 가면 계산원이 이름을 부르고, 딸 이야기를 묻는다. 하지만 '안다'는 것 그뿐이다. 그 행위가 밀턴을 진정으로 기억하고 관심 있다는 뜻은 아니다.

어느 날 밤, 밀턴의 뒷마당에 무언가 추락한다. 작고 온화한 외계인 줄스다. 밀턴은 시의회에 가서 말한다. "제 뒷마당에 UFO가 추락했습니다." 시의원들은 그의 말에 반응조차 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밀턴을 안다. 그가 퇴직한 지 얼마나 됐는지, 아내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하지만 지금 여기의 밀턴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듣지 않는다. 가족마저 그를 치매에 걸린 노인으로 치부해 버린다.


다른 조건이지만 둘은 역설적이게도 같은 상황이다. 조는 아무도 모르기에 존재감이 없고, 밀턴은 모두가 밀턴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감이 없다. 그 무존재감은 대체 저주인지 축복인지 나는 함부로 정의할 수 없겠다.




두 주인공이 살아가는 공간의 속도는 확연히 다르다.

도시는 빠르게 흐른다. 조가 여섯 명의 여성을 살해했을 때, 뉴스는 며칠간 떠들썩하다가 다음 사건으로 넘어간다. 형사들은 프로파일링을 하고 용의자를 추적하지만, 정작 매일 그들 곁을 지나가는 청소부는 보지 못한다. 사람들은 바쁘게 걷고, 차들은 쉼 없이 달리고, 뉴스는 매 순간 갱신된다. 조는 이 속도 속에서 지워진다. 청소부는 언제나 배경이고, 배경은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다.


시골 마을은 느리게 흐른다. 밀턴은 매일 같은 루틴을 반복한다. 아침 산책, 슈퍼마켓, 뒷마당에서 줄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줄스는 말을 하지 못하지만, 밀턴의 말을 경청한다. 밀턴이 죽은 아내 이야기를 할 때, 줄스는 고개를 기울인다. 밀턴이 외로움에 대해 말할 때, 줄스만이 들어준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밀턴은 여전히 투명하다. 마트에서 그의 이름조차 잘못 부르는 점원에게 UFO와 외계인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것도 되묻지 않는다. 연락도 없는 아들은 멀리 있고, 딸은 그를 '과거의 아버지'로만 기억한다. 활기차던 시절의 밀턴, 아내와 함께였던 밀턴. 그렇기에 딸은 현재의 아버지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알츠하이머 테스트를 강요한다. 지금 분턴에서 밀턴이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런 무존재감 속에서도 두 주인공은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여 주는 이를 만나고, 생애 처음으로 진실한 관계를 맺는다.


조에게 멜리사가 나타난다. 어느 날 밤 바에서 만난 그녀는 다르다. 조가 익숙한 가면을 쓰고 어눌하게 말할 때, 멜리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본다. "연기 그만해도 돼요." 그녀는 말한다. 멜리사는 조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 도시가 만들어낸 가면 뒤의 괴물을.

놀라운 것은 그녀가 겁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이해한다. 조가 처음으로 자신의 진짜 목소리로 말할 때, 멜리사는 웃는다. 둘의 관계는 파괴적이고 병적이다. 조는 일곱 번째 살인을 계획하고, 멜리사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의 곁에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이 조가 경험하는 유일한 진실한 관계다. 도시의 네온사인 아래, 괴물이 괴물을 알아보는 순간의 전율.


밀턴에게는 줄스가 온다. 외계에서 온 작은 생명체는 인간 사회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롭다. 밀턴이 나이가 많은지, 사회적 지위가 있는지, 마을 사람들이 그를 믿는지는 줄스에게 중요하지 않다. 밀턴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줄스는 대답하지 않지만, 밀턴은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이 투명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그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작은 마을의 뒷마당에서, 외로운 자가 외로운 자를 알아보는 순간의 따뜻함. 이름조차 중요하지 않은 관계.


"꼭 그래야 할까요? 어차피 여기 있는데 뭐라고 부를 필요는 없잖아요."
- 영화 중 밀턴 -




조의 이야기는 도시의 네온사인처럼 어둡고 냉소적이다. 그가 경찰서 화장실을 청소하다가 형사들의 대화를 엿듣는 장면, 그가 멜리사와 함께 다음 희생자를 물색하는 장면. 블랙 코미디의 칼날로 대도시의 위선을 벗겨낸다. 소설을 읽어 내려갈 때 잠시 웃으면서도 섬뜩함을 느낀다.


밀턴의 이야기는 마을의 밤하늘처럼 따뜻하고 회복적이다. 그가 줄스에게 지구 음식을 설명하는 장면, 줄스가 텔레비전을 신기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장면. 잔잔한 유머로 여러 노인의 고독을 감싸 안는다. 영화를 볼 때 피식 웃으면서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둘 다 웃음을 통해 같은 것을 말한다. 도시든 마을이든, 군중 속이든 공동체 속이든, 우리는 결국 혼자라고. 그리고 바로 그 고립 속에서만 진정으로 나의 존재를 받아들여 주는 관계가 탄생한다고.




결국 조의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투명함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일곱 번째 희생자를 계획할 때, 무언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멜리사와의 관계마저 균열이 간다. 괴물과 괴물의 만남도 결국은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멜리사를 마지막까지 떠올린다. 파괴된 상황에서 그래도 외롭지 않았으리라.


밀턴의 이야기는 작은 기적으로 끝난다. 줄스는 결국 떠나야 한다. 하지만 밀턴은 더 이상 투명하지 않다. 깊은 밤 혼자 소파에 앉아 창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보며 미소 짓는 건 더 이상 그가 외로운 노인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두 작품은 다른 듯 비슷한 부분이 있다. 조와 밀턴, 멜리사와 줄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공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이방인들이고, 서로를 통해서만 존재를 증명받는다. 도시의 익명성도, 마을의 친밀성도 결국 같은 투명함을 만들어낸다. 다만, 「일곱 번째는 내가 아니다」는 어둠 속에서 서로를 알아볼 것인가를 묻고 「줄스」는 빛 속에서 서로를 알아볼 것인지를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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