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메리토크라시 붕괴에 대한 두려움
아이를 낳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세상 어떤 일과도 비교가 어려운 신기한 경험이다. 유치원을 가고 학교를 다닐 미래, 그리고 어떤 삶을 살지 기대를 하기도 한다. 반면에 내 아이가 살아갈 미래가 지금 나의 관점에서 아름다울까 라는 알듯 모를 듯한 불안감이 마음 한편에 있다. 그것을 공포라고 정의할 수 있을지조차 확언할 수 없지만, 잠든 아이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도 이 작은 생명 속에서 자라나는 꿈들이 각박하고 막힌 어떤 세상의 벽에 마주하게 될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한다.
생명공학이나 유전학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필수 관람 영화로 꼽히는 "가타카(Gattaca)"를 떠올린다.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적격자'들만이 꿈을 꿀 자격을 얻는 세상에서, 자연임신으로 태어난 빈센트(Ethan Hawke)는 "내 진짜 이력서는 내 세포 안에 있다"라고 말한다. 그의 능력도, 열정도, 노력도 중요하지 않았다. 태어나는 순간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었다.
"My real resume was in my cells."
"내 진짜 이력서는 내 세포 안에 있다."
- 극 중 빈센트 -
물론 나는 지금의 아이들이 가타카 같은 극단적인 미래를 살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 본연의 인간성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타카의 극단적인 설정을 걷어내면, 그런 차별과 제한된 삶이 현실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 자유로운 선택이 갈수록 제한되고, 세상이 정해놓은 몇 개의 선택지 안에서만 삶의 길을 골라야 할지도 모른다는 부정적 생각이 가끔 나를 붙잡는다.
가타카를 처음 봤을 때, 막연히 먼 미래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이야기가 이미 다른 형태로 시작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최근 한 기사에서 강남구 아이들의 사교육비가 월 200만 원을 넘는다는 내용을 읽었다. 같은 또래 아이가 전국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에 따라 받을 수 있는 교육의 질이 이렇게 다르다니. 출발선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경기장에서 뛰고 있는 셈이다.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이 일상어가 된 지 오래다. 웃자고 하는 말이라지만, 그 속에는 서늘한 체념이 스며있다. 부모의 경제력이, 정보력이, 인맥이 아이들의 미래를 좌우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다.
내가 아이에게 "열심히 하면 다 이룰 수 있어"라고 정말 그것이 가능한 세상인지 확신이 없으면서 함부로 말할까 두렵다. 어디선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재능 있고 열정적인 아이가 부모가 만들어준 조건의 한계 앞에서 꿈을 접고 있을 상상을 하면 한 명의 아빠로서 씁쓸하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더 일어날까.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이 우리의 선택을 돕는다는 미명 하에, 사실은 우리의 가능성을 미리 재단하고 있다. 대학 입시에서 취업까지, 이제는 빅데이터가 "당신에게 적합한" 길을 추천해 준다. 과연 누가 그들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을까? 아이가 온라인 학습 플랫폼에서 수학 문제를 틀릴 때마다, 그 데이터는 어디론가 축적된다. 10년 후 그 아이가 이공계 진학을 희망할 때, 알고리즘은 냉정하게 말할 것이다. "당신의 과거 학습 패턴을 분석한 결과, 성공 확률이 낮습니다." 그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컴퓨터에게 "우리 아이는 그런 게 아니다"라고 항변할 수 있을까?
"I belonged to a new underclass, no longer determined by social status or the color of your skin. No, we now have discrimination down to a science."
"나는 새로운 하층계급에 속했다. 더 이상 사회적 지위나 피부색으로 결정되지 않는. 아니다, 이제 우리는 차별을 과학으로 완성했다."
- 극 중 빈센트 -
가타카의 배경이 상상이 아니라 예언이라는 단어로 접근하면 두렵다. 그리고 그 예언이 점점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불쾌하기까지 하다. 유전자 대신 데이터가, DNA 검사 대신 학습분석이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미리 써 내려가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얼마 전 지인의 아이가 간절히 꿈꾸던 직업이 있었는데, 진로상담 AI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상담사도 AI의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다른 길을 권했다. 그 아이는 결국 꿈을 접었다. AI가 틀렸을 가능성은 아무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 아이의 꿈을 누가 결정하고 있는 걸까?
이것이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세상이라니.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객관성이라는 명분으로, 우리는 아이들의 가능성에 미리 한계를 긋고 있다. "제롬(Jude Law)은 가타카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태어났지만,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만은 없었다"는 말이 떠오른다. 혹시 우리는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아이들을 만들어내면서도 정작 그들의 의지와 열정은 짓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모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무력감도 느낀다. 아무리 사랑으로 키워도,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결국 시스템이 내 아이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까 봐 두렵다.
그럼에도 내 아이가 직접 물려받은 조건이나 세상이 제안하는 선택지 너머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이야기를 써내려 가길 바란다. 짧은 바람이 아닌 믿음으로 다가가길 간절히 소망한다.
빈센트(Ethan Hawke)가 말했듯이 "운명을 결정하는 유전자는 없다." 마찬가지로 미래를 결정하는 알고리즘도, 꿈을 포기하게 만드는 데이터도 없어야 한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나는 다짐한다. 아이가 그림을 그리며 "나는 커서 우주비행사가 될 거야"라고 말할 때,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하겠다. "그래, 열심히 하면 정말 될 수 있어." 그리고 그것이 거짓말이 아닌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한 명의 어른이자 아빠로 책임감을 가지고 삶을 살고자 한다.
아이의 진짜 이력서는 여전히 그 아이의 마음속에, 그 아이의 노력 속에, 그 아이가 꾸는 꿈 속에 쓰여야 한다. 다른 어디도 아닌, 바로 그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