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의 놀라운 첫 작품,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세요.
사귀던 사람과 헤어지거나 이뤄지지 않는 사랑을 정리할 때 흔히 "우리는 이번 생에 인연이 아닌가 봐"라는 말을 하곤 한다. 타인과의 관계를 정리할 때 가장 쉬운 방식이다. 하지만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 쉬운 방식을 천천히 곱씹어 관객에게 전달한다. <패스트 라이브스>는 그 흔한 사랑 이야기와 달리 연애가 없다. 연애를 제외하고 애틋함, 그리움, 공백으로 사랑을 채웠다. 인연과 사랑을 풀어내는 방식을 볼 때 <패스트 라이브즈>가 감독의 첫 작품이라는 것이 놀랍다.
관계를 알 수 없는 바 테이블에 앉은 세 명이 프레임에 들어온다. 반대편에 앉은 이들이 세 명의 관계를 궁금해하며 대화를 하고 곧 세 명의 가운데 앉은 여자가 관객을 바라본다.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관객을 똑바로 보는 건 의도가 없으면 쉽지 않은 선택이다. 나도 그 선택을 받아들이며 “어디 한번 어떤 세 명인지 말해봐라” 하면서 소파에서 다시금 자리를 고쳐 앉았다.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준비하는 12살 나영(그레타 리)은 노벨문학상을 타는 것이 꿈이고 2등을 하면 하루 종일 우는 욕심 있는 성격이다. 극 중 나영이 “한국 사람들은 노벨문학상 못 타”라는 말을 하는데 2023년 개봉한 영화다 보니 2024년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탈 줄 모르고 막말(?)을 했겠지.
감독이 12살에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는 인터뷰를 보면 주인공이 감독 자신을 비추고 있는 것 같다. 첫사랑이자 친구인 해성(유태오)과 헤어진 나영의 추억도 감독 본인의 경험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12살쯤이면 좋아하는 남자친구 한 명은 있지 않았을까 싶다. 12살 나영과 해성이 헤어지는 장면에서의 대사 없는 공백과 둘이 각자 걸어가는 갈림길은 글이 보여줄 수 없는 영화의 묘미라고 하겠다.
야망을 품고 도착한 캐나다에서 나영은 노라라는 이름으로 살게 되고 12년 뒤 뉴욕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극작가로 일한다. 그리고 페이스북을 통해 해성이 자신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영은 해성에게 12년 만에 연락한다. 서로가 다시 인연이 닿았음을 경쾌한 음악으로 알리고 드디어 스카이프로 재회한다. 12살에 좋아하는 남자아이를 놔두고 타지로 떠난 나영과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떠나보낸 해성은 멈춰 있던 시간이 12년 만에 다시 재생된다. 아티스트의 꿈을 꾸며 그녀의 야망은 퓰리처로 넘어갔고, 해성한테 뉴욕으로 오라고 하지만 여러 제약으로 보고 싶다는 말은 전해지지 않고 이내 인연이 희미해지고 나영은 노라로 돌아간다.
노라는 몬톡(Montauk)에 있는 아티스트 레지던시에서 새로운 인연 아서(존 마가로)를 만나고 해성은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서 새로운 인연(황승언)을 만난다. 여기서 노라와 해성의 인연을 교차 편집하며 인연의 의미를 노라가 친절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해외 관객을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해성이 새로운 여자친구를 만나는 식당에 4천 년 노점이라고 쓰여있는 걸 보고 둘의 인연이 4천 년 만에 다시 만난 거라 나 혼자서 상상한다.
그리고 또다시 12년 뒤, 해성은 용기를 내어 아서와 결혼한 나영을 만나러 뉴욕으로 간다. 24년 만에 둘이 실제로 다시 만나는 장면을 세 번을 보는데도 사랑스럽다. 감독의 그레타 리 배우의 섭외는 이 장면으로 충분히 성공적이었다고 확신한다. 해성을 만나는 순간 노라에서 나영으로 돌아가는 찰나를 나만 느낀 것이 아니길 바란다. 둘이 브루클린 브리지에서 대화할 때 뒤에 회전목마가 돌고 있는 것이 마치 그들의 인연이 돌아가고 있는 듯 보였고, 회전이 멈추고 조명이 꺼지는 모습은 나영이 말하던 윤회사상의 굴레가 멈춘 듯 보였다.
해성이 뉴욕을 떠나는 날, 결국 24년 만에 만난 첫사랑을 또 보고 싶어 하는 나영을 이해해 주는 좋은 남편으로 인해 나영, 해성, 아서가 함께 만남을 갖는다. 영화 초반의 장면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제 초반에 영화가 던진 세 명의 관계는 우리도 알게 되었다. 나영과 해성은 패스트 라이브즈를 뒤로하고 현생에서 어떤 인연을 이룰까?
"네 남편이 좋은 게 이렇게 아플 줄 몰랐어."
- 극 중 해성 -
<패스트 라이브즈>의 대사의 표면은 지극히 평범하고 우리가 언젠가 해봤을 법한 문장으로 덮여있다. 하지만 그 속내는 지구의 맨틀같이 살아 움직인다. 왜 <패스트 라이브즈>가 오스카 각본상 후보에 올랐는가 생각해 보면 표면은 지극히 평범해서 번역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지만, 그 속의 움직임은 언어가 다른 외국인들도 느꼈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이거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처럼 이 영화에는 특별히 근사한 문장들이 없다. 평범하게 보이는 대사들 속에 앞서 언급한 애틋함과 공백을 녹여낸 각본 센스의 비범함이 묻어난다. 실물로 둘이 뉴욕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와 너다" "와"를 서로 주고받을 때 깔려 있는 공백과 함축이 주는 진정성은 둘의 재회를 기다린 나에겐 선물이었다.
"와, 너다."
- 극 중 나영 -
나영이자 노라인 주인공이 2개 국어가 가능(bilingual)하다는 설정은 <패스트 라이브즈>의 애틋함을 증폭시킨다. 한국어로 꿈을 꾸는 나영과 생활에서 영어로 말하는 노라, 남편은 나영에 꿈에 다가갈 수 없는 것이고 꿈은 해성하고만 연결되어 있다는 메타포는 부부의 각자만의 애틋함이 관객에게 닿게 한다. 영화 초반의 세 명이 바 테이블에 앉은 모습에서 서서히 아서가 프레임 바깥으로 밀려나고 나영이 남편에게 아예 등을 돌릴 때 아서에게 처연함을 느끼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패스트 라이브즈>에는 신파가 없다. 관객을 억지로 울리려고 하거나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단 한 번의 울분이 절제된 채 새어 나온다. 일부러 끼워 넣은 울분 이전의 그 긴 공백은 <본 시리즈>의 강력한 서스펜스보다 긴장된다. 24년 만에 큰 결심을 하고 하는 말이 울린다.
"그때 보자."
- 극 중 해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