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새벽녘 마당 기와 위에 까마귀가 앉아 울면, 집안 어른들은 괜히 얼굴빛을 굳혔다. 까마귀의 울음소리는 언제나 불길한 징조였다. 반대로 까치가 마당 느티나무에 날아와 지저귀면, 손님이 온다며 반가움이 번졌다. 까치의 목소리는 희망의 전령이 되고, 까마귀의 울음은 어둠의 그림자가 되었다. 나는 그 구분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며 자랐다.
일본에서 유학할 때, 나는 전혀 다른 까마귀를 만났다. 교토의 신사 앞, 고요한 아침 햇살 속에서 검은 날개가 번쩍이며 하늘을 가르는 순간, 나는 그것이 단순한 새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일본인들에게 까마귀는 길을 인도하는 존재였다. 신화 속 삼족오, **야타가라스(八咫烏)**는 세 발 달린 까마귀로, 신의 뜻을 전하고 길을 안내하는 사자였다. 축구장에서마저, 일본 축구 대표팀 유니폼 가슴팍에는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새겨져 있었다. 한국에서라면 불길하다며 피했을 그 새가, 이곳에서는 신성한 존재로 환영받고 있었다. 낯설면서도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같은 울음소리가 누군가에게는 불운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구원의 신호라니. 까마귀의 검은 날개가 문화의 차이를 가르며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스쳤다.
캐나다의 하늘 아래에서 만난 까마귀와 까치는 더욱 담담하다. 포트맥머리의 끝없는 하늘 아래, 까마귀 떼가 구름처럼 흩날린다. 이곳 사람들에게 그들은 불길하지도, 신성하지도 않다. 그저 숲의 그림자처럼, 계절의 일부처럼 존재할 뿐이다. 까치의 시끄러운 울음도, 바람에 섞여 자연스레 흘러간다. 나는 그 단순함이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삶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누군가에게 길조, 또 다른 누군가에게 흉조로 불리더라도, 결국은 각자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 까마귀와 까치는 늘 다른 이름으로 불렸지만, 하늘을 나는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오늘 창밖에 까치와 까마귀가 와서 시끄럽게 운다. 한국 같았으면 반가운 손님을 떠올렸을 것이고, 일본 같았으면 신의 계시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저 바람에 섞여 오는 울음소리 자체를 듣는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검은 날개와 흰 깃털이 함께 있어야 진짜 하늘이 완성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