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따로 그리고 또 함께.
퇴직자의 어느 하루
가방을 하나씩 들고 집을 나섰다. 오전 가사도 대충 마무리했으니 마음도 홀가분하게. 며칠 전 검색해 둔 카페로 가기로 했다. 오늘은 노트북으로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할 예정이다. 할 일이라야 특별할 건 없지만 오늘만큼은 그동안 녹슨 머리를 회전시켜보려 한다. 그러기엔 도심에 있는 카페보다 자연과 어우러진 카페가 좋을 듯싶었다. 좌석이 여유 있어 오래 머물러 있어도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에 맞는 카페를 물색했다. 가능한 가보지 않은 새로운 곳이면 더더욱 좋다.
시골길을 굽이굽이 돌아 비스듬한 언덕 위에 카페가 있었다. 아래쪽 주차장에서 올려다보니 꽤나 멀었다. 이 더위에 카페까지 걸어갈 생각을 하니 갑자기 엄두가 나지 않아 돌아갈까 싶었다. 잘못 검색한 듯싶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카페 사장님은 고객의 걸음수를 고려하지 않고 이 높은 곳에 카페를 오픈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위에 괜한 트집이다. 이왕 왔으니 호기심으로라도 비탈길을 올라가야 했다. 멀다고 해봐야 차에서 내려 바로 코앞에 있는 카페보다 조금 먼 정도다. 카페 안에 들어가니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창으로 보이는 푸르름에 기분이 상쾌해진다. 예쁜 호수의 징검다리도 멋지다. 배 한 척도 마련되어 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일단 평일이고 대형카페이다 보니 좌석도 여유 있어 고생하고 올라온 보람이 있다.
외부의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실내의 아기자기한 소품과 화분들도 꽤나 정성을 쏟은듯하다. 하긴 요즘 특색 있는 카페들이 좀 많은가?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어쩌면 이렇게 다양하고 멋진 카페들이 많을까 하는 생각에 대한민국 건축가들이 위대해 보이기까지 한다. 가끔 책을 읽는다는 명분으로 카페를 방문하긴 했지만 노트북을 챙겨서 오기는 첨이다. 그저 핸드폰을 이용했을 뿐. 보통의 카페방문은 쉼이자 여유 있는 배부름의 뒤처리 거나 수다공간이었다. 오늘은 뭔가 그럴듯한 나름의 명분을 만들어 젊은시절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조용하며 콘센트가 있는 약간의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퇴직을 할 때 사위가 노트북을 하나씩 사주었다. 퇴직기념으로. 그동안은 업무용 노트북을 사용했기에 반납하고나니 집에는 노트북이 없었다. 퇴직에 의미를 두고 장인, 장모의 앞으로의 인생 2막을 응원한다며 신형 노트북을 하나씩 마련해 준 것이다. 우리가 각자도생임을 잘 알고 있기에 흰색과 검은색으로 따로 마련해 주었다. 나는 평소 짬을 내어 글을 쓰기에 주로 노트북보다는 핸드폰을 많이 활용했었다. 남편 역시도 어쩌다 블로그를 할 때 사용할 뿐 오랜 기간 책상위에서 얌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은 그럴듯하게 사용해 그 가치를 인정해 보리라.
남편은 꿈꾸는 여행자가 되고 싶어 무언가를 기획하려 한다. 난 브런치에 글을 쓰는 작가 흉내를 내어보려고 하고. 카페 한 귀퉁이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며 각자의 머릿속 생각을 활자로 찍어냈다. 나란히 앉은 우리들 모습은 마치 같은 직장에서 일거리를 가지고 나온 직장동료 같았다. 가끔 책상 위의 커피를 한 모금씩 홀짝거리며 마실뿐 낯선 남으로 각자의 일에 몰두했다. 나는 가끔 곁눈질을 하며 남편의 진도를 살폈다. 제법 화면이 채워지는 걸 보면 그럴듯한 계획서가 짜여지고 있는 듯했다. 순조롭게 뭔가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다. 무슨 꿈을 꾸긴 꾸는 모양이다. 하긴 나도 내 노트북 브런치에 내 꿈을 담고 있으니까.
우리는 부부교사였다. 회의가 있는 날이면 같은 차를 타고 갔다. 그리고 도착하면 서로 남처럼 헤어졌다. 나는 유. 초등이 있는 동쪽으로. 남편은 중. 고등이 있는 서쪽으로. 그리고 끝나면 주차장에서 만나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밖에 나가면 같은 집에 사는 남이었다. 내가 교육청에 근무하고 남편이 일선학교에 있을 때도 동료교사들은 우리가 같은 집에 사는 걸 몰랐다. 부부인걸 안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체육대회에서였으니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혹여 서로가 불편해지는 일은 없어야겠기에 가능한 조심 했다. 물론 그래도 알사람은 다 안다. 교직사회는 의외로 좁으니까.
돌아보니 우리는 늘 따로, 같이 있었다. 지금도 우리는 함께 있어도 따로이다. 문득 Tv프로그램이 생각난다. 동상이몽이라는. 지금 이 순간도 노트북 안에서 각자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 한참이 지났다. 하고 있는 일이 시간을 다투거나 결과를 산출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정원으로 나가 함께 산책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1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이다. 1교시는 이렇게 각자 시간을 보내고 2교시에는 함께 협동수업을 하였다. 가을 여행건으로. 한달살기에서 다 못한 일주일의 제주여행을 갈 것인지, 아니면 좀 더 먼 곳으로 덤을 얹어 날아갈 것인지. 따로 노트북 안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정보 탐색전이다. 최종 결정은 꿈꾸는 여행자의 기획안에 결론으로 마무리 되리라. 딸들의 조언도 얹어지리라.
이렇게 2교시까지 카페에서 젊은 노년의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의 삶도 이렇게 채워질 것이다. 같이, 따로, 그리고 또 함께. 특별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대단한 일을 한 것 같다. 노트북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일이라 그런지 카페에는 두 팀정도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부족한 보충수업은 이미 많은 경험을 한 딸들과 조율해야겠다. 결과야 어떻든 우선 나는 여권을 갱신해 놓고 기다릴 것이다. 바다가 될지, 하늘이 될지, 손바닥 안이 될지, 밖이 될지 모르지만.
이제 꿈꾸는 여행자의 마지막 커서의 움직임에 마침표만 찍으면 된다. 적어도 여름이 다 가기 전에는 내게 협조요청을 보내오리라. 모처럼 노트북이 세상구경하느라 힘들었다. 눈도 고생했다. 그래, 다 잘살자고 하는 일인데 즐거워야 할 것이다. 눈의 고생을 입으로 즐겁게 보상하리. 날씨가 더우니 우선 체력보강부터. 나에게 날개를 달아만 준다면 오늘은 내가 쏘리라. "누룽지 삼계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