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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래빗과 함께하는 야행

국립세종수목원

by 바다나무

요즘은 밤이 화려한 세상이다. 산책을 나가면 산책로의 무수한 조명이 아름다워 발길을 멈추기도 한다. 아니 히려 내 길을 유혹한다. 다행히 태풍이 얌전히 지나간 탓에 산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수한 재난안전 문자 탓인지, 지난 폭우로 인한 선제방어 탓인지 큰 피해 없이 감사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적어도 내가 사는 지역은. 이제 "카눈" 완전히 이곳을 지나가기를 바라며 마지막 긴장 끈을 놓지 않고 주말을 지켜보고 있다.


오늘은 한차례 보슬비가 살며 스쳐 지나가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날씨가 맑았다. 어제 비가 와서 하루종일 집에 있었더니 준이가 답답해하는 것 같다. 골에서도 마음껏 놀지 못하고 태풍이 무서워 쫓기듯 나왔는데. 시 바람이라도 쐴 겸 카페로 갔다. 아름다운 정원으로 수상을 받은 카페인만큼 정원손질이 구석구석 깔끔하게 어 있었다. 커다란 돌에 풍란과 바위솔이 찰싹 몸을 기대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커피 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커피 볶는 집으로 원두종류도 다양해 커피가 입맛을 업그레이드시켜 준다. 무엇보다 커피가 리필되어 다른 종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더 마실 수 있 커피전문점으로의 명색을 드러냈다. 덕분에 오늘은 뷰와 맛이 모두 상향조정 날이다.


정원을 오가며 차 한잔을 마시고 참을 머물렀다. 다행히 카페가 한산했다. 모두들 날씨 탓에 마음을 동여매고 있는 것 같다. 고복저수지길을 드라이브하며 복숭아를 사러 갔다. 준이가 복숭아를 아주 좋아하기에. 그곳은 복숭아 축제가 열리는 산지라 싱싱한 것을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친정나들이길에 오른 딸과 별식으로 냉면을 먹었다. 물냉면과 비빔냉면을 섞어먹는 물비빔냉면에 숯불구이 고기를 올려서 먹는 시원한 맛집이다. 언제부턴가 갈등의 소지를 없애는 반반음식이 대세다. 짬짜처럼. 다행히 브레이크 타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탓에 준이와 조용하게 식사할 수 있었다. 벽면의 액자 안의 글귀가 인생의 냉면맛을 더해준다. "삶은 어차피 연극인데 좀 더 멋들어지게 연극하

살아보자"라는 글귀가.


요즘 가끔 우연히 마주친 글귀들이 마음에 와닿을 때가 있다. 나이 탓인지도 모른다. 어둠이 내려온다. 또다시 하늘이 심술을 부린다. 아까처럼 소리 없이 내리는 보슬비다. 곧 그칠 듯하니 이 정도는 애교로 봐준다. 오늘은 날씨가 종잡을 수 없으니 실내도 있고 실외도 있어 비가 와도 걱정이 없는 곳에서 산책을 할 것이다. 야경이 아름다운 국립세종수목원으로 차를 돌렸다. 여름기간 동안 금, 토 주말을 이용해 야간개장을 한시적으로 한다. 야행은 입장료도 반값이다. 넓은 야외에는 각양각색의 여름꽃과 자생식물들로 지금 "얼씨구 꽃 좋다 "라는 여름 꽃축제를 벌이고 있다. 실내에는 지중해실과 열대온실, 특별전시관이 있어 꽃과 문화와의 만남을 통해 삶의 휴식처를 제공해 준다.


밤의 풍경이 아름답다. 실내외 모두. 어느새 비는 멎었고 준이와 걸으며 꽃과 나무를 보며 을 나눈다. 오늘 같은 날 안성맞춤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특별전시관에는 피터 래빗의 비밀정원이 화려하게 꾸며져 준이의 눈길을 끈다. 아마 토끼해를 맞이해 피터 래빗과 정원식물, 그리고 조명연출을 통해 생물의 다양성과 그 중요함을 메시지로 담고 전시한 듯싶다. 어린 시절 책받침으로 가지고 다녔던 피터 래빗이 정겨움으로 추억 속에서 아났다. 귀여운 숲 속 동화나라 끼인형들을 보고 환하게 웃는 준이 얼굴이 조명아래 해맑다.


파리를 잡아먹는 식충식물 앞에서, 쓰다듬으면 향기가 나는 허브식물 앞에서, 물병모양의 물병나무 앞에서 신기한 듯 머물러 본다. 화려한 조명이 밤인지, 낮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방학이라 아이들도 많다. 연인들도 화려한 조명아래 사랑을 속삭인다. 연세 많으신 어르신을 모시고 온 가족들도 효심을 발휘한다. 모두 화려한 인생에 수를 놓 인생을 간맞춤한다. 어쩌면 멋진 연극무대를 연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야외 수목원으로 나왔다. 산책길도 예쁜 조명들로 길을 밝히고 있다. 수목원 외곽부를 돌아보는 풀빛 따라 걷길, 중심부를 돌아보는 물빛 따라 안길, 지구를 보호할 수 있는 지구와 함께 걷는 길 등 테마를 가지고 산책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학생들이 스탬프 투어를 하기도 하는 체험학습 장소이기도 하며,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이기도 하다.


걷다 보니 창덕궁의 주합루와 부용정을 본떠 만든 궁궐정원에 도착했다. 멀리서도 화려한 솔찬루가 아름다운 곡선을 자랑하고 있다. 올해 처음으로 야행에 모습을 나타낸곳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700년 긴 잠에서 깨어난 고려시대의 연꽃 "아라홍련"이 수줍은 듯 곱게 피어 있다. 이 꽃은 700년 전 고려시대의 탱화 속 연꽃이라 한다. 700년의 세월 속에서 아라홍련이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단단하고 물이 잘 스며들지 않는 껍질 때문이다. 견고함은 무한대의 생명연장을 해준다. 자연의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도담지에 어울지는 도담정의 모습이 마치 미술시간에 작업한 데칼코마니처럼 그림자로 드리운다. 또 하나의 누각이 서로를 향해 그리움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애기 부들, 속새, 무늬갈대 같은 수생식물들도 수련과 함께 자리매김하여 풍성한 정원을 만들어 준다. 역시 자연은 자연 그대로일 때 아름답다. 오염이나 이상기온으로 자리잡지 못해 정처 없이 떠돌다 사라지는 자연생태계가 안깝다


산책하는 길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준이도 쫄래쫄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잘 따라다닌다. 무더위를 잊게 하고 청량감이 드는 불빛산책길이 한여름밤 여유와 힐링을 가져다주었다. 어린 준이가 잘 알지는 못하더라도 그저 예쁘고 화려한 기억 속에서 우리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해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라면서 소중함을 느끼기를. 오늘은 준이 앞에 작은 디딤돌을 하나 살포시 놓아주었다.


* 오뜨몽드 카페. 국립세종수목원. 인생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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