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길 따라

지리산여행(산청. 하동)

by 바다나무

몸에서 신호가 온다. 어디론가 떠나라고. 이곳도 나름 시원한데 집이라고 간주하다 보니 새로운 곳으로 가라고 등을 떠민다. 간단한 등산채비와 여벌옷을 한벌 챙겨 집을 나선다. 계곡에서 발 담그고 벼운 등산이나 하고 와야겠다. 대진고속도로에 올랐다. 오늘은 지리산이 있는 산청 쪽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유독 너른 바위가 많고 계곡이 깊은 중산 두류산생태 탐방로를 따라 걸어가 본다. 최근에 조성된 두류산(지리산의 옛 이름) 생태탐방로는 천왕봉을 조망하며 싱그러운 숲. 맑은 계곡을 끼고 가장 가까이서 지리산을 느낄 수 있는 조성된 지 얼마 안 되는 트레킹코스이다.


데크와 야자매트를 따라 계곡을 걷다 보면 아름다움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지난번 어사길의 구천동 계곡과는 뭔지 모를 또 다른 느낌이다. 거대하고 넓은 집채만 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웅장함을 나타내는 은 골짜기이다. 곡에서 내려오는 모래가 쌓이고 물이 깊다는 모래소, 소의 모양이 구유와 같다는 구시소폭포, 주민들이 신성시하고 기우제 늘 지냈다는 너른 바위, 물이 미끄러져 내려오는 모양이 한량의 자태 같다는 활량소 폭포, 신선이 내려와 돌을 가지고 놀았다는 신선너덜이 계곡을 따라 명소로 등산객의 발길을 잡는다.


물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발을 담그고 청량감에 취해 계곡길을 걷다 보면 오아시스 같은 마지막 반가움의 명소를 만나게 된다. 카페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넓은 단층카페에 계곡 물을 곁에 두고 등산객에게 달콤함으로 잠시 쉬어감을 부추긴다. 조용하니 사색을 하고 지리산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어컨 없는 시원함과 아름다운 경치로 마치 신선봉에 올라와 앉아 있는 느낌이 든다. 어디선가 나비한쌍이 카페로 날아와 춤을 춘다. 제법 크고 색깔이 참 고운 파란색 나비다. 그래, 너희들도 이제 자연에서 벗어나 낯선 이곳에서 시간을 즐기고 있구나! 라며 괜한 쓸데없는 말을 건네본다. 차 한잔을 마시며 자연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중산계곡을 내려와 우리는 청학동으로 향했다. 늘 말로만 듣던. 들어서면서부터 신비롭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기분이다. 흰 바지, 저고리와 두건을 쓰신 분이 지나가신다. 초가집들이 보인다. 여기저기 눈에 익은듯한 옛것이 보인다. 서당, 물레방아, 소달구지, 솟대 등. 오랜만에 느껴보는 정취에 마냥 마음이 설렌다. 설령 이 모든 것들이 관광장소로 거듭나기 위한 연출이라 하더라도 갑다. 그리움의 물결이 출렁인다. 최근 트로트가수로 이름이 알려진 그곳 태생의 김다현 양의 집과 가는 길이 관광명소화되어 사람을 맞이한다. 역시 이름은 날리고 볼 일이다. 다소 관광지 냄새가 풍기지만 하늘과 닿은 깊은 골짜기 마을임에는 틀림없다. 네를 한 바퀴 돌면서 어디선가 훈장님이 나타나 "너는 누구냐!" 하시며 금방이라도 곰방대로 호통을 치실 것 같아 옷매무시를 다듬 조심스레 걸어본다.


청학동에는 삼성궁이 있다.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성전이고 수도장이다. 홍익인간의 세상을 위하여 무예와 가, 무, 악을 수련하는 사람들의 터전이라고 한다. 그들이 수련하면서 쌓아 올린 수많은 돌탑이 주변환경과 어러져 신비롭기도 하고 동남아를 방불케 하는 이국적인 풍경을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입장시간이 마무리되어 먼발치에서만 볼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또 하나의 세상을 이루고 있는 아늑한 공간은 예쁜 단풍이 어우러진 어느 날 다시 한번 와야겠다. 멀리서 바라보고 돌아서는 쉬움에 자꾸 뒤가 돌아다 보인다.


하동의 청학동을 지나 돌아오는 도중 산청의 남사예담촌에 들렀다. 남사예담촌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지정된 300년이 넘은 한옥마을이다. 이 씨 고가, 최 씨고가, 사양정사, 이동서당, 이사재, 이제개국공신 고서비 등 돌담길을 따라 문화재를 관람할 수 있다. 고즈넉한 돌담길의 담장너머로 그 옛날 선비들의 기상과 덕망을 느낄 수 있다. 문득 담장 위의 익어가는 석류를 보며 3살 때 외할머니 집에서 "석류피리 쇄홍주"(석류껍질 속에 붉은 구슬이 부서져 있다)라는 한시를 지은 어린 율곡의 천재성과 덕망을 떠올렸다면 너무 멀게 선비님을 나들이시킨 거겠지? 강릉에서 산청까지니까. 이렇듯 알고 있는 어설픈 지식을 동원해 담장 안의 모습을 재현해 내는 엉뚱함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좋아했던 사극 "왕의 남자"에서 배경이 되었던 부부 회화나무를 만나고 싶었다. 두 그루의 나무가 서로 어깨를 기대듯이 서있는 이 길을 부부가 같이 걸어가면 백년해로를 한다기에. 이 씨 고가를 들어가는 진입로에 멋지게 드리워져 있다. 열심히 사진을 찍어 주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사람이 내가 백년해로할 사람이기에. 예스러움이 가득한 담장길을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며 흐드러지게 늘어진 능소화에 잠시 눈길을 주고 한스러움을 달래준다. 왕의 성은을 기다리다 죽어간 궁녀의 사랑이 능소화가 되어 담벼락을 수놓고 있다. 상사화로 피어난 능소화가 처연하게 느껴졌다. 어둠이 내려오는 탓이리라.


남사예담촌 돌담길을 벗어나 집으로 오려다 배도 채우고 피곤도 풀고 가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이미 늦은 터라 완벽하게 백수의 도리를 다하고자 지리산숯불가마촌으로 핸들을 돌렸다. 어차피 더운 날씨 이열치열로 한판 승부를 걸어 보아야겠다. 우선 식당이 잠시 후 문을 닫는다고 하니 숯불구이로 배터 채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숯불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삼겹살이 그냥 지나쳐 보이지 않는다. 잠시 후 내 몸도 토굴에서 기름대신 땀방울로 수축될 테니까.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역시 어디가 도 요즘은 연세가 지긋하게 드신 여성분들이 대세다. 물론 나도 그 대열 어느 언저리에 끼여 있 것이다. 그분들은 토굴과 바깥 들마루를 연신 교대로 드나들며 구운 달걀과 시원한 식혜로 냉온탕의 세계를 넘나들며 신선의 세계에 살고 계다. 토굴 앞에서 황토색 찜질복을 입은 모습들은 마치 화전민, 아니 원시인을 방불케 한다. 웃음이 났다. 마치 이 깊은 지리산 자락이 세상과 단절된 무릉도원 같았다.


우리도 조그만 나무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나무 슬리퍼를 신은채 토굴 속에서 시인이 되었다. 잠시 후 견디지 못한 나는 뛰쳐나와 들마루에 몸을 누이고 깊은 호흡을 했다. 오늘은 곰이 호랑이에게 졌다. 아무래도 역사를 다시 써야 할 것 같다. 흐르는 땀을 한여름밤의 바람이 살며시 와서 닦아주었다. 잠이 올 것만 같았다. 주목적이 찜질방보다는 식당이었기에 잠깐만 머물렀다. 시간도 오래되고 갈길도 멀고. 오늘도 내발은 나를 위해 헌신하였다. 아직은 내 발길 따라가는 길에 심장이 먼저 서고 있다.


*두류산 생태 탐방로(산청). 카페 중산리. 하동 청학동(삼성궁), 남사예담촌(산청), 지리산 참숯불가마(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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